12월의 과학사: 용광로에서 태어난 양자(quantum)

 20세기를 코앞에 둔 1900년 12월 14일.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근무하던 막스 플랑크는 물리학회에서 ‘스펙트럼 에너지 분포 법칙의 이론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논문을 발표한 플랑크 본인조차도 과연 이 내용이 정말 물리학적으로 맞는 말인지 아니면 계산적 편의를 위한 가정에 지나지 않는지 확신이 없었다.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해당 내용은 20세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대한 물결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 물결의 이름은 바로 ‘양자역학’이었다.

막스 플랑크의 사진


 플랑크가 아직 대학생이던 1870년대, 과학자들은 뉴턴이 만든 고전역학이라는 거대한 벽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문제없이 견고해지던 고전역학에 몇 가지 약점이 존재했다. 그 대표격에 속하는 것이 바로 ‘흑체복사’문제였다. 실험과 이론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골칫덩어리였던 이 흑체복사 문제는 신기하게도 산업 혁명과 연관이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이 중화학 공업으로 진화하여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된 19세기. 이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는 독일의 라인란트 지역이었다. 물론 독일이 처음부터 산업혁명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영국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산을 뚫고 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에는 당시로서는 특이했던 선택 하나가 큰 역할을 했다. 바로 국가 주도 연구소의 설립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통일이 늦어 근대국가로서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린 것이 뒤처진 독일은 과학 기술에 사활을 걸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사업가 겸 물리학자였던 베르너 폰 지멘스였다. (현재 독일의 대기업인 지멘스의 창업자이기도 하다.)

독일 에센 지역에 위치한 제철소(1864년)


 19세기 때까지도 ‘과학자’는 ‘직업’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대학교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본업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푸코 진자로 유명한 레옹 푸코는 과학 기사를 쓰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산소를 발견한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원래 직업이 목사였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애초에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물리학자 핸리 캐번디시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멘스의 주장으로 1887년 설립한 제국 물리 기술연구소는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기술 발전을 위한 미션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완공된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건물
현재는 베를린 산업문화센터가 되어 있다.


 그 미션 중 하나로 흥미로운 연구가 주어졌다. 당시 중화학 공업에서 중요했던 것 중 하나는 용광로의 운용이었다. 강철을 제조하기 위해서 용광로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상당히 정교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용광로는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단순하게 온도계를 가져다 놓는 것이 불가능한 공간이 아닌가? 그나마 쇳물의 색깔에 따라 온도를 추정할 수는 있었다. 그렇다면 이 추정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이 문제는 철강 산업뿐 아니라 막 태동한 전구(전기) 산업에도 연관이 있었다. 필라멘트의 색을 분석해 전구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제국 물리 기술연구소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이 온도 문제가 떠올랐다.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는 모습. (사진: 포스코)


 사실 연구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다. 1862년 독일의 구스타프 키르히호프는 특이한 물체를 하나 가정했다. 모든 파장의 전자기파를 완벽하게 흡수하는 물체. 그로 인해 어떠한 빛도 반사되지 않아 검은색으로 보이는 물체. 키르히호프는 이 물체를 ‘흑체’라 불렀다. 이런 흑체가 빛을 방출하는 것을 흑체복사라 부른다. 키르히호프는 이 흑체복사의 세기가 물체의 모양이나 구성 물질과 전혀 관련 없이 오로지 온도와 빛의 파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였다. (이를 키르히호프 법칙이라 부른다.) 이제 학자들에게는 이 흑체복사 그래프를 해석해야 하는 난관이 펼쳐졌다.

흑체복사 그래프. 온도마다 가장 에너지가 많이 나오는 파장이 정해져 있다. (사진: 한국천문연구원)


 그래프만 해석하면 되었다. 물리학의 난제이기도 했고 해결할 경우 온도에 대한 이해를 높여 산업적으로도 유용한 문제였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답처럼 보이는 것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1879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요제프 슈테판이 실험을 통한 데이터를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했고 이 내용을 1884년 역시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볼츠만이 이론적으로 계산해냈다. 이를 슈테판-볼츠만 법칙이라 부르며 흑체의 에너지가 온도 4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96년에는 독일의 빌헬름 빈의 변위 법칙을 실험적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1900년 6월. 영국의 제임스 진스와 존 레일리가 레일리-진스 법칙을 발표하면서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문제는 각각의 이론이 실험값과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정 파장에서는 꽤 그럴듯한 결과를 보였지만 모든 파장대에서 그런 값을 보이지 못했다. 특히나 레일리-진스 법칙에 따르면 짧은 파장대에서 에너지가 무한대로 날아가 버리는 황당한 결괏값을 보였다. (훗날 이 결괏값을 자외선 파탄이라 불렀다.) 이처럼 완벽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레일리-진스 법칙에 의해 나타난 자외선파탄. 검은 선이 그래프 상단으로 치솟아 올라가버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였던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하게 실험값을 해석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론이 이미 존재했던 전자기학, 열역학으로 해석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1899년, 플랑크는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빈의 변위 법칙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빈의 법칙은 완벽한 이론이 아니었다. 계속된 실험 결과가 빈의 변위 법칙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플랑크는 좀 더 정확한 설명을 해내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보통 과학자들은 생각하기 힘든 파격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고전역학에서 물리량은 연속적인 값으로 나타난다. 숫자만 보더라도 1과 2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숫자가 존재한다. 1.1, 1.2, 1.3, 1.31,…. 이런 방식으로 무한하게 연속적인 수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속적인 값으로 흑체복사의 에너지 문제를 계산하려니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플랑크는 아주 이상한 가정을 선택했다. 빛 에너지는 연속적이 아니라 특정한 값의 정수 배만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은 1과 2의 에너지는 가질 수 있지만 1.1의 에너지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빛 에너지를 덩어리처럼 만들어서 계산한 결과 신기하게도 실험값에 딱 들어맞는 이론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에너지 덩어리를 우리는 ‘양자(quantum)’라고 부른다. 고전역학을 넘어서 새로운 과학. ‘양자역학’이 역사에 처음 얼굴을 들이민 순간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론을 만든 플랑크나 당시 동료들은 이 이론에 엄청난 의미를 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플랑크 본인에게 에너지를 양자화시켜 계산한 내용은 단순하게 계산적 편의성이자 결괏값을 맞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동료들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이 이론에 숨은 폭탄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폭탄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바로 이론 발표 이후 5년이 지난 1905년. 스위스의 특허국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발표한 광양자설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논문이었다. 그리고 폭발을 시작한 양자역학은 빠른 속도로 퍼져 유럽 전역의 물리학자들의 화두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 광전효과 논문 첫 페이지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이 불씨가 되어 양자역학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세상을 휩쓸 때에도 꿋꿋하게 고전역학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양자역학의 뿌리를 만든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모두 해당 이론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은 재미있는 요소이다.) 그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플랑크의 이론은 20세기를 과학의 격변을 만든 시작점이었다. 과거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당사자였지만 그 스스로는 과거 천동설이 지배하던 과학적 사고에 묶여있는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플랑크 역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이론 체계의 변곡점이 된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은 고전역학에서 발을 빼내지 못했다. 이처럼 과학은 당사자의 의도와 다르게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존재해왔다. 과연 또 어떤 작은 출발점이 훗날의 거대한 산을 쌓게 될지 흥미롭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막스 플랑크 협회 본관의 모습. 플랑크의 이름을 딴 이 협회는 현재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기관 중 하나로 자연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의 연구소를 포함하여 80여개의 연구소가 전세계에 포진해 있다.

참고자료

  1. 이준호. 2014. 과학이 빛나는 밤에. 추수밭
  2. 김상욱. 2018.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3. 이상욱. 2019.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 1900년 베를린, 플랑크의 ‘양자 혁명’. HORIZON
  4. 이종필. 2021. [사이언스N사피엔스]빛나는 흑체, 20세기를 열다. 동아사이언스
  5. 김영훈. 2019. 알아두면 쓸모 있는 양자역학 이야기 – 플랑크 상수. SAMSUNG DISPLAY Newsroom
  6. 임경순. 2000.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물리학과 첨단기술

Copyright 2021. 의왕천문소식 김용환 연구원 All right reserved.
dydgks0148@astrocam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