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과학사: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1500년대를 주름잡던 무역 강국 베네치아. 신대륙의 발견으로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키프로스 지역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베네치아는 해군 강국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강력한 베네치아의 지배자였던 총독 레오나르도 도나토는 1609년 8월 25일. 유용한 발명품을 시연한다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성 마르크 광장 종탑에 올랐다. 그곳에서 총독이 본 것은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긴 물건으로 지금은 ‘망원경’이라 불리는 장치였다. 그리고 그 물건을 가져온 사람은 파도바 대학의 교수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이탈리아의 화가 주세페 베르티니가 그린 프레스코화. 갈릴레이가 베니스의 총독에게 망원경 사용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갈릴레이가 자신이 직접 만든 망원경을 시연하기는 했지만 그가 망원경이라는 물건의 첫 발명가는 아니었다. 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는 검투사 경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에메랄드 같은 보석을 시력 교정 도구로 사용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렌즈에 의한 굴절을 설명한 책을 쓰기도 했다. 제대로 된 렌즈 그리고 안경은 13세기 후반에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1352년에 제작된 ‘위고 추기경의 초상화’라는 작품에 최초로 안경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렌즈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망원경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이탈리아 화가 톰마소 다 모데나가 그린 위고 추기경의 초상화(1352). 인물의 눈에 안경으로 보이는 것이 걸려 있다.


 망원경을 누가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1500년대의 수학자였던 토마스 디지스는 자신의 아버지 레너드 디지스가 렌즈를 이용하여 멀리 있는 물체를 크게 보이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나 확실한 증거물이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1608년, 네덜란드에서 무려 3명이 렌즈 두 개를 이용하여 망원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스 리페르셰이, 아코프 메티우스, 사카리아스 얀센 세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특허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특허권 싸움은 너무 많이 알려지고 복제가 쉽다는 이유로 전원 특허 불허라는 승자 없는 대결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특허권 기각으로 인해 전 유럽에 퍼지게 된 망원경의 이야기가 오히려 여러 사람이 기기를 적극적으로 개량하기 쉬워지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한스 리페르셰이의 초상화. 현재는 세 사람 중 리페르셰이를 최초의 망원경 제작자로 인정하는 편이다.


 갈릴레이 역시 망원경을 개량하는 일에 뛰어든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 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인 빈첸조 갈릴레이가 사망한 이후 집안 전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관계로 여동생 결혼 지참금까지 그의 몫이었다. (심지어 이 지참금을 기한 내에 내주지 못해 고발당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교수 월급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던 그는 다른 부수입이 꼭 필요한 상태였다. 그 결과 유력 집안의 개인 교습뿐 아니라 발명품을 통한 수익 창출 역시 그의 목표가 되었다.

갈릴레이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온도계의 모형 그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온도계라기보다 온도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이를 갈릴레이 혼자 발명했다기보다 동료들과 같이 연구했던 것으로 본다.


 처음 제작한 초기 발명품 중 알려진 것은 온도계였다. 그는 온도에 따라 공기의 부피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공기 온도계를 제작했다. 공기가 주입된 유리관을 물그릇에 담고 유리관 안에 빨려 들어간 물기둥의 높이가 온도에 따라 변하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온도 변화를 눈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이었을 수 있지만 기압, 습도의 영향, 정확한 온도를 알기 어렵다는 점 등 단점이 많아 그의 재정난을 해결해 줄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다. 온도계는 금전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갈릴레이의 발명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지갑 사정을 상당 부분 도와준 발명품은 컴퍼스였다. 군사 목적으로 제작한 그의 컴퍼스는 제대로 히트를 쳤다. 판매에만 멈추지 않은 갈릴레이는 사용법을 돈 받고 가르치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물건도 팔고 사용법 교습으로 돈도 받는 일석이조의 발명품이었다.

갈릴레이의 컴퍼스


 이처럼 발명으로 상당한 이득을 본 갈릴레이에게 네덜란드에서 들려온 망원경에 대한 소문은 돈을 벌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군사용으로 망원경을 사용한다면 유용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미 시중에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퍼졌고 제작 방법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면 다른 제품보다 월등한 성능이 판매 전략이 될 것이었다. 이것이 갈릴레이가 망원경 성능 개량에 빠르게 착수한 이유였다.

갈릴레이가 만든 망원경의 모습


 그가 처음 개량한 결과물은 3배율 정도의 망원경이었다. 물론 이 정도 성능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직접 렌즈를 깎아가면서 망원경 제작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8~10배율의 망원경이었다. 갈릴레이는 이 물건을 들고 베네치아의 총독과 관리들 앞에서 시연에 성공했다. 먼바다에 위치한 배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적 가치가 높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지원금과 월급이 상당히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기에는 망원경을 제작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갈릴레이 역시 총독에게 보여준 망원경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성능 좋은 제품을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선택은 천문학, 어쩌면 과학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다.

코시모 2세의 초상화. 갈릴레이를 중용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30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갈릴레이가 총독에게 시연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9일. 그가 매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네덜란드의 망원경 제작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는 자랑이 담겨있다. 베네치아의 일 이후 그의 목표는 토스카나의 대공 코시모 2세였다. 갈릴레이는 코시모 2세가 유럽을 주름잡던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이던 시절에 개인 과외를 하기도 했다. 1609년 그가 대공의 직위에 오르자 갈릴레이는 이를 기회로 삼아야 했다. 곧바로 제작에 들어간 다음 망원경의 성능은 20배율까지 상승했다.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망원경의 성능을 압도적으로 상승시킨 갈릴레이는 그 방향을 수평선에 위치한 배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였다. 기록 상으로 그가 처음 관측한 하늘의 천체는 ‘달’이었다. 그는 달을 관측하면서 표면이 기존의 통념과 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매끄러운 달과 달리 무언가 울퉁불퉁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는 단순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틀렸다.’라는 문장으로 끝내기에는 파급력이 컸다. 기존 과학 학설을 부정하는 증거 그 자체였다. 갈릴레이의 연구는 달 관측에서 멈추지 않았다. 망원경의 목표가 달뿐 아니라 여러 천체들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갈릴레이의 달 스케치
토마스 해리엇의 달 스케치. 달을 망원경을 통해 최초로 본 사람은 갈릴레이가 아니었다. 그보다 약 4개월 먼저 관측한 사람은 영국의 천문학자 토마스 해리엇이다. 하지만 그의 망원경은 6배율 정도로 갈릴레이 것에 못 미쳤다.


 망원경 속에 담긴 천체는 달, 은하수, 목성, 토성 등 다양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성에 이상한 점 4개가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목성의 위성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때 관측한 자료를 모아 1610년 3월에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우주의 질서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성의 위성 4개는 메디치 가문 형제들에게 바쳐 그가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물론 추후에 갈릴레이가 주장한 이름이 아닌 그리스 신화 속 이름으로 다 변경되기는 했다.)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속 목성의 4대 위성 (메디치의 별) 묘사 부분. 위성이 목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갈릴레이가 책을 내고 나서도 망원경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어 왔다. 그의 망원경 성능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다른 망원경으로는 목성의 위성을 확인하기 어려웠고(마침 갈릴레이의 관측 이후 목성과 지구 사이 거리가 멀어지면서 확인하기 더 어려워진 점도 있었다.) 달의 크레이터 역시 망원경이 감각을 속이는 도구라 지칭하며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다른 망원경의 제작 수준이 올라오면서 4대 위성은 세상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고 달 모습 역시 여러 사람의 관측 그림으로 울퉁불퉁한 모습이 퍼져나갔다. 새로운 눈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케사레 크레모니니의 초상화. 그는 당시 파도바 대학의 철학교수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기도 했다. 갈릴레이의 대학 동료였지만 망원경 관측을 거부하고 그의 관측 결과를 부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갈릴레이의 발명은 순수하게 연구를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손재주가 좋았고 발명에 관심이 많았던 갈릴레이에게 망원경은 특별한 존재라기보다 하나의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망원경의 목표를 하늘로 바꾼 순간 인류는 그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다. 이전 천문학은 천체 하나를 자세히 보는 연구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움직이는 궤도를 연구하고 계산하는 것이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망원경이 더 자세히 하늘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천체 망원경은 갈릴레이가 만들었던 구조와는 많이 달라졌다. 렌즈에 의해 생기는 색수차, 왜곡 등 여러 방해 요인을 억제한 현재 기술에게 갈릴레이가 최초 제작한 구조는 과거의 잔재일 수 있다. 크기 역시 기다란 막대기에 불과했던 그의 망원경을 훨씬 뛰어넘어 초거대 망원경 혹은 아예 우주를 떠도는 망원경까지 만들어지는 시기가 왔다. 비록 그가 만든 새로운 눈은 형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천문학자들의 조수가 되어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처럼 우주라는 넓고 광활한 공간을 우리 눈앞에 끌고 와준 고마운 존재인 천체망원경의 시작이 출세를 바라던 한 학자의 집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갈릴레오 망원경의 접안렌즈 부분(갈릴레오 박물관 제공). 직경 26mm의 작은 렌즈 조각이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참고자료

  1. 김명호. 2020. 관찰과 표현의 과학사. 이데아
  2. 홍성욱. 2023. 그림으로 읽는 과학사. 김영사
  3. 데이비드 아이허. 2017. 뉴 코스모스. 예문아카이브
  4. 이준기. 2012. 망원경의 역사. 디지털타임즈
  5. Bill Gourgey,전승민. 2024. 400년간 우주를 엿보다… ‘망원경’ 역사 총정리. POPULAR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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