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는 화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음의 높이가 다른 두 개 이상의 소리가 동시에 울렸을 때 조화되는 그 음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음악이 완성된다. 이런 음악 속 소리의 조화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마음을 울려왔고 지금도 여러 음의 연속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다. 음악은 이렇게 귀로만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린 시절부터 예체능이라는 분류로 묶여 따로 공부해야 했던 음악은 사실 과학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연구 주제 중 하나였다. 음악에 담긴 아름다운 조화가 바로 신의 조화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7세기 과학 역사에 가장 위대한 발전이 있던 시기,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긴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목표는 신이 만든 우주의 조화를 찾는 것이었다.
음악을 과학,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 숫자를 가장 사랑한 학자 피타고라스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 모든 진리가 수학이라 생각한 피타고라스는 자연 역시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음 역시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화음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보였다. 악기에 있는 현의 길이를 절반으로 줄여 튕겨도 잘 어울리는 음이 나오며 3분의 2로 줄여도 음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피타고라스 음계라는 것이 형성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만들어진 5개의 음계가 동양에도 비슷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흔히 궁상각치우라 불리는 중국의 음계 역시 피타고라스의 음계와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동서양 구별할 것 없이 화음을 찾아냈으며 피타고라스는 수학적으로 이를 해석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1000년을 건너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전달된다.
케플러의 어린 시절은 천문학과 큰 연관이 있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귀족 가문이었으며 할아버지는 고향의 시장직을 하고 있었지만, 케플러 대에 들어서는 그 모든 것이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참전하는 용병으로 집에 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케플러의 표현대로라면 괴팍한 편에 속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그나마 그의 유년 시절 우주와 관련된 경험은 1577년 지구를 찾아온 혜성을 관측한 일이었다. 고작 6살의 어린 나이였던 케플러에게 그 경험이 인생의 거대한 변곡점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의 훗날 여정을 생각하면 나름 흥미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케플러의 고생길은 유년기를 넘어 청소년기에도 이어졌다. 신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대학에 들어간 그의 눈에 당시 유럽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구교와 신교의 다툼뿐 아니라 신교 간의 다툼으로도 혼란스럽던 유럽의 상황에서 케플러는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지속했다. 루터교를 믿는 케플러였지만 다른 종파의 교리에도 일정 부분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런 일로 피를 보고 서로 물어뜯는 모습 자체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케플러의 생각은 같은 루터파에게도 달갑지 않은 사상이었다. 어느 쪽에서도 썩 환영받기는 힘든 신앙을 가진 케플러가 신학자의 길을 떠나 천문학자의 길로 조금씩 이동한 것은 튀빙겐 대학 재학 시절 수학, 천문학을 담당했던 미카엘 메스틀린 교수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었다. 다만 메스틀린 교수는 일반적인 천문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지동설에 관심을 보였고 케플러에게 이 내용 역시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케플러는 지동설이 오히려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신이 만든 우주에는 분명히 아름다운 조화가 숨어있을 것이었다. 그 조화로움에 조금 더 적합한 것은 행성의 운동을 조금 더 이치에 맞게 설명하는 지동설이었다. 물론 이 이론이 케플러에게 흥미를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학도라는 신분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신학 공부의 졸업을 몇 달 남기고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온다.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위치한 신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케플러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우주의 조화로움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변화하였다.
지역의 수학자가 해야 하는 일은 가르치는 것 말고도 다양했다. 천문력을 제작하고 그를 통해 점성력을 만들어 다음 해에 일을 예언해야 했다. 케플러는 점성술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나름대로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었기에 이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던 케플러가 당시에 고민하던 문제는 간단했다. ‘왜 행성은 6개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따르면 지구 역시 행성이기 때문에 당시에 알려져 있던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함께 6개의 행성이 존재했다. 다른 사람들이 천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질 때 케플러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만약 행성이 6개인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 행성들에게는 신이 만든 조화로움이 담겨 있을 것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특이한 답안을 떠올렸다.
그는 행성 개수의 이유를 정다면체에서 찾았다. 정다각형으로 만들 수 있는 다면체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딱 5개뿐이다. 케플러는 태양계 행성들이 이 정다면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생각했다. 정다면체가 5개뿐인 이유와 행성이 6개인 이유를 엮은 것이다. 이 생각을 떠올린 그는 우주의 신비를 알아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다만 이 사실이 증명되려면 실제 관측 자료가 있어야 했다. 이전에 관측된 기록으로 비교했을 때는 자신의 생각이 얼추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한 자료가 필요했다. 과연 그의 생각이 우주의 조화, 우주의 신비를 밝혀낸 것이 맞는지 알아야 했다.
이 생각이 담긴 ‘우주 구조의 신비’(실제 본 제목은 너무나 길어서 보통 우주의 신비로 줄여 부른다.)가 출간되고 케플러는 다른 학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여러 군데 책을 보냈다. 이때 책을 받았던 사람 중에는 우르수스라는 이름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케플러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케플러가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가장 거대한 존재와 엮이는 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천문학자라고 한다면 덴마크의 귀족 출신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를 떠올렸다. 당시 국왕의 비호를 받아 섬 하나에 거대한 천문대를 직접 건축하고 여러 관측장비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2세가 사망하고 그 아들 크리스티안 4세가 즉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천문대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려던 티코의 계획은 틀어졌고 새 국왕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귀족으로서, 천문학자로서 영향력이 아무리 커도 국왕을 등에 업은 반대파를 이기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프라하로 망명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2세를 새로운 후원자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천체 운동 이론을 훔쳐 간 우르수스가 프라하에 왕실 수학자로 있었으니 복수까지 할 기회였다.
우르수스는 티코를 공격하기 위해 젊고 능력 있는 케플러를 이용하려 했다. 그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식으로 책을 작성하였는데 티코는 이 사실을 알고 케플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케플러의 책을 보고 그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결국 1600년. 두 천문학의 거목이 드디어 만났다.
티코와 케플러는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출신부터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티코와 평민 집안이었던 케플러는 서로 잘 맞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유럽의 정세는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케플러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그라츠에서 신교 박해가 이어져 더 이상 머물 수 없었고 티코는 덴마크에서 망명해 온 처지에 자신의 연구를 도와줄 조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서로 행성의 운행 방식에 대해서 견해 차이는 컸지만 상대방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살얼음판처럼 이어져 온 협력 관계는 티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달라졌다. 루돌프 2세는 티코의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전했다. 당시 티코와 케플러가 루돌프 표라는 이름의 행성 운행표를 만들기로 했던 관계로 티코의 뒤를 이어 케플러가 이를 완성해야 했다. 케플러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실 수학자가 되었으며 티코의 당대 최고의 관측 자료를 자신의 연구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케플러는 티코가 화성을 관측한 자료를 주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행성의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는 법칙을 발견한다. 행성이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의 부채꼴을 그린다는 점이었다.(이 내용은 적분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적분 개념이 없었다. 케플러는 부채꼴의 넓이를 구하기 위해 이를 아주 잘게 쪼개는 방식을 택했다. 적분의 기본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을 발견한 그는 곧 티코의 화성 궤도 관측 기록과 자신의 계산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았다. 오랜 고민 끝에 케플러는 ‘원 궤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두 가지 사실은 케플러의 법칙 2와 1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직도 고민이 남았다. 여전히 모든 행성들의 궤도에 숨은 조화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행성의 궤도와 거리는 무언가 규칙이 있어야 했다. 절대로 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궤도로 놓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은 그를 끊임없는 연구의 길로 빠지게 만들었다. 후원자였던 루돌프 2세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서 신교도였던 케플러는 궁전을 떠나야 했다. 린츠로 떠나 자리 잡은 케플러는 1618년 5월 15일.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조화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가 알게 된 마지막 퍼즐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행성의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은 행성 주기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케플러 3법칙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1618년 5월에 완성된 ‘우주의 조화’라는 책은 1619년에 출판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는 이를 음악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각 행성의 움직임을 음계로 표현하여 우주의 소리를 나타내려 했다. 신이 만든 음악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은 당시에 곧바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가 3번째 법칙을 알아내고 얼마 뒤 구교와 신교의 충돌이 다시 발생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또 한 번 바뀌었다. 혼란의 시기 속에서 케플러 역시 온전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까지 밀린 급여를 받으러 여러 도시를 여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병 때문에 사망하고 만다. 사망 후 무덤마저도 전쟁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우주를 꿈꾸던 대 천문학자의 마지막으로는 아주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케플러는 아주 종교적인 학자였으며 그가 생각한 우주의 조화는 사실 잘못된 것이 많았다. 행성은 6개가 끝이 아니었으며 찾으려 했던 행성들의 음악 역시 결과를 위해 끼워 맞춘 흔적이 더 많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 결과물을 얻기 위해 그가 생각한 방식이었다. 단순히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려는 것을 넘어 왜 그런 움직임을 하는지 알아내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태양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케플러 이후 세대인 뉴턴이 완성한 중력 법칙과 개념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철저하게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하여 오랜 고정 관념이었던 행성의 원 궤도를 타파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에 노력하였다.
그 발단이 어찌 되었건 케플러의 행성 운동 3법칙은 천문학 역사에 길이 남을 한 획을 그었다. 비록 그가 원했던 천상의 음악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사의 흐름을 바꿀 거대한 결과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생을 바쳐 그가 찾아다닌 조화는 완벽한 원도 아니었고 완벽한 정수비율도 아니었다. 그 살짝 어긋난 움직임이 모여 거대한 우주의 톱니바퀴를 이루고 있다. 100억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우주의 톱니바퀴를 생각하면 이미 케플러가 찾은 것은 충분히 아름답고 장대한 조화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열심히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지구도, 그 위에 서 있는 우리 역시도 우주의 조화 속에 잘 지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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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티 퍼거슨 (이충 역). 티코와 케플러. 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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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호. 2021. 케플러의 환상과 “세계의 조화”. HORIZON
- 정경훈. 2012. 평균율과 순정률. 네이버캐스트 수학산책
- 지웅배. 2021. [사이언스] 우주의 진짜 소리를 담으려 했던 ‘음악가’ 케플러. 비즈한국
- 이광식. 2015. [이광식의 천문학+] 온갖 불운을 타고났던 ‘왕따’, 우주의 이정표를 세우다. NOW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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