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6년 3월 5일. 추기경이자 종교 재판관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를 포함한 교황청 배심원단은 특정 사상을 ‘성서에 위배되는 잘못된 것’이라는 칙령을 발표하고 해당 서적에 ‘교정될 때까지 출판을 금지’한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해당하는 사상은 ‘태양이 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라는 내용이었으며 출판 금지가 된 서적의 제목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였다.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작가가 73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은 금서 목록으로 지정해 놨어도 이미 세상 곳곳에 과학 혁명의 불씨를 심어 놓은 뒤였다. 지동설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생각 한복판으로 던져 놓은 작가의 이름은 바로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우리는 이를 라틴어 이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로 더 잘 알고 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유럽은 문화의 발전과 잦은 전쟁이 공존하던 혼란 그 자체인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르네상스가 점차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음과 동시에 바다 건너에서는 새로운 대륙이 발견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그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다. 여러모로 복잡하게 얽혀있던 시기,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폴란드 역시 전쟁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일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의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1473년에 태어난 그는 실질적으로 전통적인 천문학자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그 형제를 돌봐 준 외삼촌 루카스 바르젠토데는 훗날 바르미아 지역의 대주교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대학을 다니는 것에 지장이 없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이때 천문학에 대해, 특히 행성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가 천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과 별개로 대주교가 된 외삼촌에 의해 바르미아의 참사회원이 된 그는 법학을 배워야 했다. (참사회원은 성당에서 급여를 받는 임원으로 예배나 건물 관리 등 교구의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교회법에 대한 공부로 학위를 받은 그의 진로는 단순한 참사회원이 아니었다. 의술까지 배워 다른 회원들을 치료하는 치료사가 되어야 했다. 물론 그사이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을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괴리는 클 수 밖에 없었다.
대주교의 비서 역할을 하던 코페르니쿠스는 그 자리를 떠나 참사회원으로서 성당 내부 일에만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줄어든 일로 생긴 여유는 천문학 연구에 들어갔는데 이때 이미 지동설에 관한 개념 기본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1510년 경 ‘짧은 해설서’라는 제목이 붙은 원고에는 지동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부 지인들에게 필사본으로 전해진 이 원고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이 천문학자로 알려지게 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짧은 해설서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원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511년, 참사회의 회계 담당자이자 공식 서한을 담당하는 역할까지 받게 된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외삼촌 바르젠토데 대주교의 일로 인해 훨씬 더 업무가 많아지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져 지방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농민들의 경제적인 문제와 화폐 정책의 빈틈을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때 코페르니쿠스처럼 해당 문제에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바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였다.) 이렇게 바쁜 지방 출장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코페르니쿠스에게 다가온 것은 독일 기사단의 침략이었다.
1년 남짓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참사회원 코페르니쿠스는 여전히 폭풍의 중심에 있었다. 외삼촌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된 루잔스키 주교가 사망하면서 반년 가까이 주교 대리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다음 주교가 임명되면서 이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난 그는 다시 참사회원으로서만 일을 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의 나이는 50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쁜 사이사이에도 그는 천문학 관련 연구를 끊임없이 진행하고는 있었다. 월식을 3차례나 관측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 프톨레마이오스의 달 궤도와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천문학적 역량을 높게 평가한 라테란 공의회에서 역법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를 직접 초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천문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여전히 지동설에 관한 내용은 지인들에게만 전달된 ‘짧은 해설서’ 뿐이었다. 나이만 점점 더 들어가는 코페르니쿠스에게 이 내용을 세상에 퍼트리도록 권한 인물은 1539년. 그를 찾아온 젊은 수학자 요아힘 레티쿠스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레티쿠스는 고작 25살의 젊은 나이였다. 비텐베르크에 있으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전해 들은 그는 직접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먼 길을 떠났다. 단순히 지적 교류를 위한 여행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는데 그가 일하는 장소가 비텐베르크였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당시 비텐베르크는 마르틴 루터가 일하는 곳으로 신교의 중심지라 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바르미아의 주교는 루터파를 자신의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선언을 한 직후였다. 그야말로 종교를 건넌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유일한 제자가 된 레티쿠스는 그와 함께 연구한 내용을 담아 ‘첫번째 보고’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발표한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관심을 받게 된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맛보기 정도로 볼 수 있는 ‘첫번째 보고’를 뛰어넘는,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레티쿠스에게 넘어간 코페르니쿠스는 결국 원고의 출판을 허락했다. 1542년 5월. 레티쿠스는 두터운 원고를 뉘른베르크로 가져와 인쇄를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출판을 허가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이론이 알려졌을 때 이어질 비난을 걱정했다. 이는 그가 직접 쓴 서문. 교황에게 바치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상모략에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교황의 판단이라는 권위로 저를 비방자들의 모략에서 보호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천문학을 전혀 모르면서 말하기는 좋아하는 무지한 자들이 뻔뻔스럽게 성서 구절의 의미를 왜곡하여 그들의 목적에 맞게 저의 저술을 비난하고 공격할 것입니다. -후략-‘
책에 대한 걱정은 코페르니쿠스 본인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 레티쿠스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적을 옮기면서 책의 인쇄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맡아 준 사람은 루터교의 신학자였던 안드레아스 오지안더였다. 오지안더는 책의 서문에 본인이 직접 코페르니쿠스를 위한 변명을 작성했다. 그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쓰여 있는 주요 내용인 지동설이 실제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가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지의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 학문에 입문할 때보다 더 심한 바보가 되어 떠나게 될 것이다. 천문학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니 가설에 관한 한, 천문학으로부터 어떤 확실성도 기대하지 맙시다.”
물론 이 서문은 코페르니쿠스의 동의를 받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오지안더가 이 서문을 작성하고 책이 발간되었을 때 이미 코페르니쿠스는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겨 이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레티쿠스는 이 내용을 보고 큰 분노를 느꼈으며 후대 학자들 중 일부 역시 오지안더의 서문이 부적절했다고 말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요하네스 케플러가 있다.) 하지만 오지안더의 서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종교계 인사들에게 조금 더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당장 루터파의 수장이었던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듣고 반대하는 의견을 표했으며 학자들 중에서도 그의 의견을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1543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책이 발간되고 5월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나자 지동설이라는 학문은 레티쿠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점점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400부 정도로 만들어진 초판은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주제와 내용 때문에 일부 학자들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책은 지금과 달리 제본이 제각각이었으며 여백에 소유자가 필기를 해놓은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어떤 인물이 책을 소유했고 연구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긴 대학자 뿐 아니라 신학자, 성직자, 천문학자 등 여러 지식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계산을 책에 적어 놓았고 심지어 이전에 적혀 있던 문구에 첨언하거나 반박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단순히 지동설을 주장한 책으로 끝내기엔 과학의 역사. 크게 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것은 기존 프톨레마이오스로 대표되는 천동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관측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구를 가운데 두고 행성을 움직일 때 관측한 결과와 예측값의 차이가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아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존재했다. 행성이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씩 달라진다거나 방향이 거꾸로 간다거나(역행) 눈으로 보이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조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대표적으로 각 행성이 단순한 원 궤도가 아닌 주전원이라는 또 다른 원 속에 원 형태의 궤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궤도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었다. (이심원 개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하늘은 코페르니쿠스가 봤을 때 굉장히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신이 창조한 하늘이 이러한 복잡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은 그가 지구를 고정된 점에서 탈출시킬 생각을 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책의 서문에서 그가 밝힌 천동설의 단점을 본인 역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 역시 행성 운동의 중심에 태양을 두지 않았으며 주전원 역시 완벽하게 삭제하지 못했다. 단순 계산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정확하지도 않았고 단순화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성경에 반해 지구를 움직이게 만든 이 체계가 왜 훗날 불어온 거대한 폭풍을 만들었을까.
14세기 영국의 학자였던 오컴의 윌리엄(오컴 지역 출신이어서 이렇게 불린다.)은 훗날 ’오컴의 면도날‘이라 불리는 논리를 자주 사용했다. 단순하고 간결한 것이 진리에 더 가깝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현대 많은 과학 분야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코페르니쿠스의 구조는 기존 이론을 획기적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학자들에게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기존의 생각을 보완하는 것에 급급하던 세계에 그가 던진 돌이 만든 파문은 거대했다.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의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궤도에서 군더더기를 조금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티코 브라헤는 훨씬 정교한 관측 자료를 통해 자신만의 궤도 체계를 만들어냈고 요하네스 케플러는 원 궤도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훨씬 간단한 그림을 그려냈다. (케플러가 소유했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책에는 ’타원‘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흔히 과학 혁명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의 시작을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년도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끝은 아이작 뉴턴이 1687년 프린키피아를 만들어낸 때로 본다.) 우리가 이 사건을 천문학 혁명이라고 명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만든 생각의 방식이 모든 과학의 영역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600년대 과학을 하는 방법인 귀납법과 연역법이 정리되었고 천문학을 넘어 물리, 생물, 화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한층 발전한 결과를 얻고 있었다. 교회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활동과 엮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수정 전까지 금서‘라는 목록에 올라갔어도 학계에서 이 책이 자취를 감추는 등의 상황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책을 바로 금서목록으로 지정하지 못한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그레고리력을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본인의 저서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주의자이자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라 불렀다. 그는 과거의 이론에서 문제를 찾아냈고 다른 방식을 찾아냈지만 완벽하게 이전의 이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역사의 흐름이 그를 기점으로 완전하게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약간의 틈을 만들어냈고 그 작은 차이는 마지막에 거대한 변화로 나타났다. 다른 시선으로 보는 방법, 생각을 변화시키는 방법 같은 단어는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만큼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만든 결과물을 ’현대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으로 잘 알고 있다. 그가 당긴 혁명의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민영기, 최원재 역), 1998.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서해문집
- 토마스 쿤(정동욱 역). 2016. 코페르니쿠스 혁명. 지식을만드는지식
- 데이바 소벨(장석봉 역). 2012.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 웅진지식하우스
- 오언 깅거리치(장석봉 역). 2008.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지식의숲
- 존 그리빈(권루시안 역). 2021. 과학을 만든 사람들. 진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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