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과학사: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

 미리내, 밀키웨이(milky way), 천하(天河), 한수(漢水).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밤하늘을 찍은 사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은하수’가 그 주인공이다. 뿌연 빛깔의 띠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보면 이름 그대로 은빛 강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신비로운 하늘의 무늬를 보며 과거 인류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헤라 여신의 젖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와 직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강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은하수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의 흐름일 것이다. 단순히 ‘아름답다’라는 감정으로 끝내기에는 인간의 호기심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은하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대답은 1785년 2월. 영국에서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에 의해 발표되었다.

호주에서 촬영한 은하수 사진(의왕어린이천문대 호빗쌤 촬영). 은하수는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은하수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기상학’에서 이오니아의 대학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의견을 적어놓았다. 두 학자는 모두 은하수가 무수히 많은 별의 집합체라고 말했다. 정작 이 의견을 적어놓은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은하수가 지구 대기 범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의견이 맞다면 은하수를 다른 지역에서 관측했을 때 모습과 위치가 달라지는 ‘시차’가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은하수의 ‘시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 대기 정도에 머물기엔 은하수는 아주 멀리 있는 존재였다.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이 저서에서 은하수 관측 결과를 언급하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그럴 듯 했지만 근거가 없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관측으로 이미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이 은하수의 정체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찾아낸 사람은 1600년대 과학 역사의 중심 인물이자 천문학 연구의 흐름을 바꿔버린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천체 망원경을 통해 은하수를 살펴 본 그는 이것이 무수히 많은 별의 향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던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동시에 우주의 넓이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알려준 완벽한 증거이기도 했다.

토마스 라이트의 초상화. 그는 천문학자 이전에 측량사 일도 했으며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도 겸했는데 이때 교류했던 가문 사람 중 한 명이 훗날 수소의 발견, 지구 밀도 측정으로 유명한 핸리 캐번디시이다.


 은하수가 별이 가득 찬 무언가라는 것은 확인했다. 그렇다면 저 별의 모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은 영국에서 활동한 토마스 라이트라고 하는 천문학자였다. 1750년 발간된 그의 저서 ‘우주에 관한 독창적 이론 또는 새로운 가설’(An Original Theory or new Hypothesis of the Universe)에는 은하수가 동그랗고 납작한 디스크 모양이며 그 중심에 태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들어있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그의 저서가 독일의 함부르크까지 전해진 것은 1년 후인 1751년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라이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이 우주가 뿌연 섬우주(은하)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당연히 이 우주 속에 수많은 은하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사실 칸트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일반 자연사와 천체이론’이라는 천문학 내용이었다.)

라이트의 논문 속 삽화


 아무리 라이트와 칸트가 은하수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고 해도 이는 머릿속 생각의 영역에 그치고 있었다. 또한 ‘은하’라는 개념이 정착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그렇다면 증거가 있어야 했다. 과연 저 별로 가득 찬 은하수가 정말로 원반 모양의 무언가이며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봐야만 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뛰어든 인물이 바로 독일 출신의 영국 음악가였던 윌리엄 허셜이었다.

윌리엄 허셜의 초상화. 그는 아버지처럼 군악대에 속해 있었으나 전쟁을 피해 사실상 영국으로 탈영을 했다. 악보 사본을 판매하면서 생활하던 그는 훗날 기사 작위까지 받게 된다.

 
 군악대의 오보에 연주자였던 아버지처럼 음악가의 길을 걷던 윌리엄 허셜은 독일을 떠나 영국에서 자신의 재능을 떨쳐 보였다.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그는 고향에서 지내고 있던 여동생 캐롤라인 허셜을 영국으로 불러들여 소프라노로 데뷔시키기도 했다. 교향곡을 20곡 이상 작곡하며 점차 인정받던 음악가는 자신의 특이한 취미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천문학이었다. 이는 윌리엄 허셜 뿐 아니라 캐롤라인 허셜의 인생을 바꾼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라틴어같은 언어 뿐 아니라 수학, 특히 최고의 학자였던 뉴턴에 의해 본격적으로 빛을 본 광학에 대해서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대의 나이에 자기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관측을 수행할 결심을 하게 된다.

캐롤라인 허셜의 초상화. 어린 시절 병으로 인해 한쪽 눈이 실명되었으며 키도 작아 어머니에 의해 하녀 교육만 받으면서 지냈다. 그런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가 최초로 봉급을 받은 여성 천문학자이자 왕립 천문학회 명예회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루 16시간씩 거울을 갈면서 식사까지 여동생의 손을 빌려 해야 했던 그는 자체 제작한 망원경으로 역사에 남을 발견에 성공하게 된다. 1781년 3월. 별 사이를 움직이는 행성. 천왕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당시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던 행성에게 허셜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이름을 붙였고 이듬해 왕실 직속 천문학자라는 직함과 함께 많은 후원금을 얻게 되었다. (이 이름을 맘에 들지 않아 했었던 프랑스는 행성의 이름을 ‘허셜’ 행성으로 불렀다. ) 왕립 학회의 일원으로 선출되고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유럽 전역에 판매하면서 생활이 나아진 허셜 남매는 더 이상 음악가가 아니었다. 완벽한, 뛰어난 ‘천문학자’ 그 자체였다.

1789년 완성된 허셜의 40피트 망원경. 당대 최대의 망원경으로 제작되었다.


 천왕성 발견 이전부터 쌍성 관측, 성운 등의 심원천체 관측에 힘쓰던 그는 좀 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였다. 목표는 은하의 구조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라이트와 칸트가 이론적으로만 생각했던 은하의 형태를 직접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기본 개념은 간단했다. 은하수에 위치한 별의 개수를 모두 확인하여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별의 개수를 (허셜은 이것을 star gage라 표현하였다.) 은하수의 상대적 거리 측정치로 사용하였다. 별이 많이 보인다면 그만큼 은하수의 공간이 넓은 것이고 적다면 좁은 것으로 판단했다. 하늘을 600개가 넘는 영역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자신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한계 등급의 별까지 확인을 거듭했다.

 각 영역에서 확인된 별의 개수는 은하수 부근으로 들어갈수록 증가했으며 은하수에 들어갈 때 급격하게 상승했다. 반대로 은하수와 90도의 각도를 지닌 지역에서는 개수가 상당히 줄어듬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은하수는 은하의 단면 모양이며 우리가 그 속에 있음을 밝혀낸 것이었다. 결국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라이트와 칸트의 생각이 증거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관측 결과는 1875년 2월, 왕립학회를 통해 ‘하늘의 건설’(On the construction of the heavens)이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발표된다. 이름처럼 우주에 건설된 거대한 구조에 조금이나마 다가간 연구 결과라 볼 수 있었다.

허셜의 논문 속에 등장한 은하수 지도


 다만 허셜의 연구에는 몇 가지 허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별까지의 거리를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이야 ‘우주 거리 사다리’로 통칭되는 다양한 거리 측정 방법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태양계 내 천체의 거리를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별의 실제 밝기가 같다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별은 밝고 멀리 있는 별은 어둡다. 이는 별마다 밝기가 천차만별이며 영향을 주는 요소 역시 다양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금 지식으로 보기에는 문제점이 상당히 많은 가정이 되었다. (실제 별의 밝기에는 온도, 크기 등의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한 은하수 내의 별을 모두 확인하는 것 역시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우리 은하의 중심에는 수많은 별 이외에도 엄청난 양의 성간 물질이 존재한다. 이 성간 물질은 뒤편에 있는 별빛을 흡수하여 본래 밝기보다 어둡게 보이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허셜은 궁수자리 쪽에 위치한 은하 중심 방향과 반대쪽 방향의 별 개수를 비슷하게 보고 말았다. 이는 ‘은하 속 태양의 위치가 중심점이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캅테인의 논문 속에 삽입된 연구 자료


 허셜의 은하수 지도는 이후 1922년 네덜란드의 캅테인이 사진 촬영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보완하였으며 동시대 미국의 천문학자인 섀플리에 의해 태양이 은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은하의 나선팔 구조 및 헤일로 구조 등 실제적인 모습을 차근차근 밝혀나가고 있다. 납작하고 다소 성긴 느낌의 허셜의 지도가 상당한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우물 속에 앉아있는 개구리가 우물의 모습을, 무성한 숲 속에 있는 개미가 숲의 전체 모습을 알아내는 것에 성공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은하 상상도
우리은하의 위아래로 뿜어져 나오는 감마선 방출인 페르미 거품의 상상도.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구조(2010년)이며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여전히 우리은하의 완벽한 구조와 모습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거나 도전한다는 것에는 많은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허셜 남매가 자리 잡아가던 음악가라는 길을 떠나 천문학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단순히 망원경을 만들기 시작한 아마추어 천문학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노력 끝에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는 보다 더 큰 우주의 형태와 비밀을 밝혀내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허셜이라는 이름은 천문학 역사의 거목이 되어 후대에 길이 남아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작은 지구에서 거대한 은하 구조를 쳐다보는 그들의 연구는 망원경 속에서 거대한 미래의 가능성을 찾아낸 도전이 아니었을까.

참고자료

  1. 김명진 외. 2023. 90일 밤의 우주. 동양북스
  2.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강환 역). 2019. 웰컴 투 더 유니버스. 바다출판사
  3. 이광식. 2018. [이광식의 천문학+] 우리은하 형태, 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 400년의 기록. Now news
  4. Raymond Shubinski. 2022. How we learned the shape of the Milky Way. Astronomy.com
  5. Michael Hoskin. 1981. herschel and the construction of the heavens. Journal of the British Astronom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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