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2월 7일. 플로리다에 위치한 케네디 우주센터에 새턴V 로켓이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발사 예정 시간은 12월 6일 오후 9시 53분 (미 동부 표준시 기준)이었으나 컴퓨터 장비 오류로 인해 계속 연기되고 있던 중이었다. 결국 밤 12시가 넘어 날짜가 바뀌어 버렸고 12시 33분. (협정 세계시 기준 새벽 5시 33분) 새턴V 로켓은 화려한 불꽃을 뿜으면서 플로리다의 밤을 낮처럼 바꿔놓았다. 이 발사는 아직까지도 달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폴로 17호의 출발이었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블랙홀 마냥 끌어당기는 것에 성공했다. 탑승했던 우주인인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축하 행사에 참여해야 했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리처드 닉슨은 여러 유명 인사 및 관계자를 초청하여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새턴V 로켓이 만든 불꽃처럼 밝은 면만 보였던 아폴로 미션이지만 그 뒤편에 드리운 그림자도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라이스 대학에서 연설을 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 미국의 달 탐사 프로젝트는 진행 중에도 수많은 암초를 만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NASA에 투입된 예산만 10년 동안 25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를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약 1700억 달러가 넘어가며 우리나라 돈으로는 206조 원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2023년 전체 예산안이 639조 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NASA로 흘러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예산으로 야심 차게 달 정복을 준비하던 미 정부에게 강력한 카운터펀치가 날아드니 그 이름하여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5년에 본격적으로 발발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국가 예산의 많은 부분을 전쟁으로 돌려야 했다. 이뿐 아니라 모든 대중이 아폴로 계획을 두 팔 벌려 환영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아폴로 11호의 발사 현장에는 역사적 현장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 뿐 아니라 빈곤, 인종 차별 등의 사회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시위자들도 모여들었다. 이는 이후 발사에서도 반복되었는데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 등 혼란기 그 자체였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아폴로 프로젝트가 마냥 환영받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폴로 11호의 대성공은 오히려 다음 미션에 대한 관심도를 급격하게 떨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NASA는 달 착륙에 성공한 이후 후속 미션으로 긴 시간 달 표면 체류, 월면차 활용 등 다양한 과학 미션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여 성조기를 세워 놓자 이후에 간 우주인이 무슨 일을 하건 대중들에게 큰 어필을 하기 힘들어진 것이었다. 과학자나 관련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미션이어도 보통 사람들에게 달의 흙을 퍼온다거나 그 위에서 오래 머문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와닿는 일은 아니었다. 당장 TV 프로그램조차도 이전에 비해 방송 시간을 길게 할당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자 카메라조차 아폴로 우주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NASA는 미래를 걱정하며 아폴로 프로젝트의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기존 예정되어 있던 아폴로 20호까지 무난하게 진행될 여력은 없어 보였다. 1970년 1월. 아폴로 11호의 대성공이 1년도 지나지 않아 20호 발사 계획은 취소되었다. 20호 발사 계획 취소 3개월 뒤인 1970년 4월, 발사대에는 아폴로 13호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13호는 남은 계획마저 박살 내는 것에 일조하고 말았다. 달로 향하던 우주선의 산소탱크가 폭발하면서 아폴로 프로젝트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직면한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3명의 우주인이 무사귀환하면서 NASA의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주긴 했으나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고가 생겼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닉슨 대통령은 본인의 재선에 아폴로 13호의 사고가 악영향을 줄 것을 두려워하였다. 닉슨은 72년 대통령 선거 이전에 그 이후 발사 예정이었던 아폴로 16호부터 모조리 취소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아폴로 계획은 살얼음판 위에 놓인 처지였다.
보좌관들의 반대로 15호가 아폴로 우주선의 마지막 번호가 되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지만 추가적인 우주선 발사의 취소는 필연적이었다. 같은 해 9월. 아폴로 18호와 19호의 발사가 취소되었다. 남은 14호, 15호, 16호, 17호를 이용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과를 남겨야 했다. 착륙 장소도 조금씩 변경되었고 발사 일정도 13호 사고 이후 조금씩 늦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나비효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폴로 우주선의 탑승자는 보통 3회차 이전 아폴로 계획의 예비 승무원들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폴로 12호의 예비 승무원들은 그대로 3회차 뒤인 15호의 승무원이 되었으며 아폴로 13호의 예비 승무원들도 16호에 그대로 탑승하였다. 이 순서대로라면 아폴로 14호의 예비 승무원들이 달에 가는 마지막 표를 얻게 되는 상황이었다. 사령관 유진 서넌, 사령선 조종사 로널드 에반스, 착륙선 조종사 조 엥글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17호 이후 미션이 취소되면서 NASA는 다른 선택을 하나 하게 된다. 기존 18호에 탑승할 것으로 예측되었던 우주인 해리슨 슈미트를 조 엥글 대신 17호에 탑승하도록 한 것이다.
해리슨 슈미트는 1965년 NASA가 과학자를 대상으로 뽑은 우주인 중 한 명으로 하버드대학교 출신 지질학자였다. 과학계는 달 탐사라는 엄청난 미션에 군인이 아닌 실제 학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까지 아폴로 미션으로 달에 간 우주인 중 민간인은 가장 유명한 닐 암스트롱 혼자였으며 그 조차도 군 복무 경력이 있는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었다.) 이러한 기대를 안고 15호 예비 우주인으로 선정된 슈미트는 18호에 탑승하여 달에 착륙하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과학계는 슈미트의 달 탐사 참여를 위해 NASA를 설득했다. 그 결과 71년 8월. 아폴로 17호의 승무원이 서넌, 에반스, 슈미트로 확정되게 된다. (이때 기회를 뺏긴 조 엥글은 우주왕복선 계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출발부터 여러 변경 사항이 가득한 17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션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최대한 많은 과학 장비를 넣고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15호 때부터 사용한 월면차를 이용한 탐사는 물론이고 지진파 기록, 대기 조성 실험, 중력계 설치, 우주선(cosmic ray) 탐지, 중성자 탐지 등 온갖 장비와 미션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났지만 아폴로 17호는 그 마지막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새턴V 로켓 최초의 야간 발사로 계획된 아폴로 17호의 발사는 예상보다 늦기는 했지만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로켓은 아폴로 우주선을 달을 향해 성공적으로 던졌다. 기존에 아폴로 우주선들이 진행했던 대로 우주선이 선회하여 달 착륙선과 도킹에 성공했으며 달을 향한 3일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사령선 조종사 에반스는 멀어지는 지구로 카메라를 돌렸다.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된 사진이라고도 불리는 ‘블루마블’의 탄생이었다.
비행은 성공적이었다. 12월 10일. 아폴로 17호는 달 궤도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착륙선 챌린저호는 선장인 서넌과 조종사 슈미트를 태운 채로 달의 타우러스-리트로우 지역에 착륙하였다. 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한 번에 7.6km까지 이동하는 기록을 세운다. 3번의 선외 활동, 총합 22시간으로 가장 긴 선외 활동 기록 역시 17호의 몫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넌이 월면차의 휠 펜더 한쪽을 부숴버리는 약간의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무난한 활동이었다. (테이프로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 때문에 두 사람은 바퀴에서 나오는 달 먼지를 계속 얻어맞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오렌지색 토양을 찾아 슈미트가 굉장히 흥분하기도 했다. 이는 오래전 달 내부 용암이 분출되어 만들어진 알갱이로 밝혀졌다.
약 3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두 사람은 110kg이 넘는 월석을 채취했으며 많은 과학장비를 달 표면에 설치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달 표면에서 마지막으로 발을 뗀 사람은 선장이었던 서넌이었다. 그는 우주선에 자리 잡아 마지막으로 짧은 연설을 진행했다.
“That America’s challenge of today has forged man’s destiny of tomorrow. And, as we leave the Moon at Taurus-Littrow, we leave as we came and, God willing, as we shall return: with peace and hope for all mankind. Godspeed the crew of Apollo 17.”
“오늘날 미국의 도전이 내일 인류의 운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달에 왔을 때처럼 이곳 타우러스-리트로우를 떠납니다. 그리고 신의 뜻대로, 우리는 이곳에 돌아올 겁니다. 전 인류의 평화와 희망과 함께. 아폴로 17호 승무원에게 행운이 있기를.”
1972년 12월 14일. 인류는 달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뗐다. 그들은 귀환길에서도 우주유영을 하며 우주선 바깥에 부착된 장비를 회수하는 등 남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12월 19일. 남태평양 바다에 착륙하면서 역사에 기록될 아폴로 달 탐사 미션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아폴로 미션은 순수하게 달 탐사만을 목적으로 가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에서 시작된 아폴로 미션은 수많은 위기와 비판을 겪으면서 인류 역사에 남을 결과를 얻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절대 달에 착륙했을 수 없다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니 지금 생각해도 NASA의 이 미션은 단순한 달 착륙, 탐사가 아니라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아폴로 미션에 참여했던 많은 우주인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노년의 나이로 생의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17호 귀환 당시 이번 세기 마지막 달 탐사를 축하한다고 한 것처럼 20세기 안에 새로운 발자국이 달에 새겨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2017년, 미국이 새로운 달 탐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21세기에는 사람이 다시 달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계획이라 명명된 이 미션은 달 우주 정거장 건설, 달 기지 건설 등 훨씬 거대한 계획을 품고 있다. 이미 2022년 아르테미스 1호가 달 궤도를 도는 것에 성공하였고 2025년에는 아르테미스 3호로 달에 착륙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
2017년 1월 16일. 달에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유진 서넌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달의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진행될 아르테미스 계획이 대성공을 거둬 달에 도착할 우주인의 앞에 LAST가 아닌 NEXT가 붙기를 기원해본다.
참고자료
- NASA 아폴로 17호 홈페이지
- 크리스토퍼 완제크 (고현석 역). 2021. 스페이스 러시. 메디치미디어
- 엘리자베스 하웰. 2022. Apollo 17: The final moon mission of the Apollo era. SPACE.COM
- 크리스토퍼 클라인. 2022. Apollo 17: Inside NASA’s Final Moon Landing Mission. History
- 리디아얼리 깁슨. 2022. Apollo 17 Turns 50. HARVARD magazine
- 닉 스미스. 2021. Late Great Engineers: Gene Cernan – the last man on the Moon. THE ENGINEER
- 김인한. 2022. 아폴로 17호 달 착륙 50주년…이후 밟지못한 달[우주다방].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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