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총부리를 들이밀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폭발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에서는 칼텍의 물리학자가 발표한 논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계속되는 중력의 수축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가진 이 논문에는 그 어떤 것도 탈출할 수 없는 특이한 천체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훗날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름. ‘블랙홀’이라 불리는 천체를 수면 위로 올린 이 연구의 중심축은 당시 30대의 젊은 미국인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블랙홀의 개념은 사실 오펜하이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천체에 대한 생각은 1783년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성직자였던 존 미첼이 처음 언급했다. 지구에서 공을 머리 위로 던지면 언젠가 아래로 다시 떨어진다. 우리는 모두 이 이유가 중력 때문임을 알고 있다. 만약 여기서 공을 던지는 힘을 조금씩 키우면 뭐가 달라질까? 당연히 공이 올라가는 높이가 달라질 것이다. 이처럼 점점 공을 빠르게 힘줘서 던지면 그 높이가 높아질 것이고 어느 순간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냥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게 된다. 이렇게 추가적인 외력없이 어떤 천체를 탈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도를 탈출속도라 부른다. (지구 표면에서 중력을 이기고 탈출하려면 초속 11.2km 정도가 필요하다.) 미첼은 뉴턴의 이론을 통해 탈출속도를 계산하던 중 특이한 현상을 생각해냈다. 별의 질량이 같은데 둘레가 줄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경우에 탈출속도는 계속 상승한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중력이 강해진다. 그런데 둘레가 줄어들었으니 표면에서의 중력 역시 강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둘레를 계속 줄여가다 보면 어느 순간 탈출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지는 때가 온다. 이 천체에서 탈출하려면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 한다는 뜻인데 이는 불가능하니 사실상 모든 입자(빛 입자를 포함하여)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미첼의 이러한 생각은 10여 년 뒤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금새 내용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미첼의 생각은 빛이 입자의 형태라는 것을 가정한 내용이었다. 반면에 1800년대 초반에 빛이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는 증거가 계속 등장하면서 그의 생각의 기초 부분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이후로 한참 동안 블랙홀에 대한 생각은 물리학의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잠을 깨운 것은 1900년대 초중반. 역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1915년 말,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중력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자신의 이론 안으로 집어넣는 것에 성공했다. 질량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휘어질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은 독일의 촉망받는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의 관심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무기로 하여 별에 의해 생기는 시공간의 휘어짐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산은 매우 뛰어났다. 물론 회전하지 않고 완벽한 구형에 해당하는 별을 가정하고 한 계산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천문학자들은 별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충분히 멋진 표준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의 계산대로면 별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작아질 경우 이상한 형태의 값이 나온다. 빛의 파장을 무한대로 보내버려 절대 볼 수 없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분명히 슈바르츠실트의 계산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한 천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 가장 널리 이 이론을 알린 아서 에딩턴은 대놓고 이러한 현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수학적인 결과가 있더라도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이 논쟁을 피하려 했다. 아직 이 천체의 흔적은커녕 그 근처도 못 간 관측 결과로는 아인슈타인의 권위를 무너트리기 역부족이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시간이 해결해 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블랙홀 반대파에 서 있던 에딩턴의 제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가 열었다.
1930년, 19세의 대학원생이었던 찬드라세카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하기 위해 배에 타고 있었다.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에딩턴의 제자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백색왜성’이었다. 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중력과 그 중력을 이기려는 압력의 힘싸움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참 젊은 별은 핵융합 반응으로 생겨난 압력으로 중력을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핵융합 반응을 마친 별은 그 압력이 없어져 중력에 의해 수축을 시작한다. 계속 별을 쪼그라들게 만들던 중력은 어떠한 힘에 의해 다시 평형을 유지하게 된다. 백색왜성의 높은 밀도가 이 수축에 의한 것이라는 건 알려져 있었다. 또한 중력을 막아낸 힘이 흥미롭게도 전자에 의해 생겼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배에 타 있던 찬드라세카는 이상한 계산 결과를 얻게 된다. 별의 질량이 너무 클 경우 전자의 힘으로도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알아낸 한계 질량은 태양의 1.4배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질량이 큰 별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일까.
찬드라세카의 이 계산은 스승이었던 에딩턴의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된다. 심지어 1935년, 학회에서 직접적으로 찬드라세카의 수학적 증명을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에딩턴의 이러한 태도는 찬드라세카를 이 연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누가 맞는 설명을 했는지 알려지게 되었지만(결국 찬드라세카는 198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으로 보상받게 되었다.) 여전히 에딩턴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 백색왜성보다 더 붕괴하는 별은 ‘있을 수 없는 부조리한 방식’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내용을 믿지 않았다.
에딩턴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진실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찬드라세카에 의해 질량이 큰 별은 백색왜성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졌으니 이제 그러한 별의 마지막은 어떤 결말을 가지게 될지 알아내야 했다. 그 해답은 비슷한 시기 대서양을 건너 미국 칼텍의 물리학자인 프리츠 츠비키와 발터 바데가 연구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초점을 맞춘 천체는 신성이었다. 갑자기 밝기가 증가하는 이 천체는 고대부터 여러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관측 기술의 성장으로 이 중 몇몇 신성이 사실은 우리 은하 안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외부 은하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거리가 훨씬 멀어졌기 때문에 신성의 밝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밝기 변화에 이끌린 츠비키는 ‘초신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좋은 재료가 하나 등장했다. 원자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중성자라는 새로운 입자가 발견된 것이었다. 츠비키와 바데는 바로 이 중성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계속된 압축으로 인해 별이 ‘중성자별’이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강한 충격파가 초신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괜찮은 해석이었다. 1933년에 발표된 이 논문은 중성자별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도 상당히 뛰어난 예측을 담고 있었다. 초신성과 중성자별 뿐 아니라 우주선(cosmic ray)의 기원에 대한 추측도 담고 있던 논문은 안타깝게도 당시에 크게 주목받기는 힘들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추측에 가까웠고 제대로 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성자별은 1967년이 되어서야 처음 발견되었다.) 이처럼 별의 마지막 과정에 대한 조각모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바톤을 받을 사람이 바로 오펜하이머였다.
당시 이론물리학의 메카는 유럽이었다. 상대성이론부터 양자역학까지 새로운 물리학이 팝콘처럼 튀어나오던 시기, 오펜하이머 역시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새로 태어난 양자역학의 내용을 고국인 미국으로 가지고 돌아온 그는 버클리와 칼텍 두 군데에서 교수직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아인슈타인과 달리 오펜하이머는 상당히 열정적인 교수였다. 그의 노력으로 여러 학생들과 두 대학을 오가며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대학원생들은 6개월마다 거처를 옮기는 고민을 이겨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다.) 이 연구팀의 레이더에 들어온 것은 중성자별이었다.
찬드라세카는 1.4 태양질량이 백색왜성의 한계라는 점을 알아냈다. 그 이상의 질량을 가진 별은 중성자별이 될 것이라 츠비키가 예측했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알아내야 할 것은 ‘과연 중성자별에는 한계질량이 없을까?’였다. 츠비키는 핵물리학이나 상대성이론에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 이유 때문에 찬드라세카처럼 질량 한계를 계산하는 것은 딱히 시도하지 않았다. 연구 목표 역시 중성자별로 인한 초신성, 우주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 부분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와 연구팀은 달랐다.
이 연구에 뛰어든 사람은 오펜하이머 이외에 같은 칼텍 교수였던 리처드 톨먼과 제자였던 조지 볼코프였다. 이 문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방법이 필요했다. ‘모르는 것은 뒤로 밀어두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중력에 이어 중성자가 버티는 힘(중성자 축퇴압이라 부른다.)은 계산 가능했지만 핵 안에서 주어지는 힘인 핵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핵력을 무시한 채로 먼저 계산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이 상태방정식의 답을 얻기위해 숫자를 일일이 대입하는 고생을 한 결과 ‘핵력’이 없을 경우 중성자별은 0.7태양질량보다 작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핵력의 영향력을 추가한다면 어떤 값이 나올까. 핵력이라는 힘이 당기는 힘일지 밀어내는 힘일지 모두를 고려하여 계산에 추가한 답은 태양 질량의 0.5에서 몇 배에 이르는 범위였다. 현대의 지식을 통해 계산하게 되면 이 한계는 태양 질량의 1.5~3배가 된다. 이 한계를 세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TOV(톨먼, 오펜하이머, 볼코프) 한계라 부른다. 이 결과는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중성자별도 한계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보다 큰 질량의 별은 어디로 가야 그 끝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오펜하이머가 무거운 별의 끝을 찾아다니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 역시 이 문제를 위한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이용하여 블랙홀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계산을 1939년 발표하게 된다. 일반적인 별의 크기를 줄이게 되면 중력을 이기기 위해 압력이 상승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의하면 별의 둘레가 한계치의 1.125배에 가까워지면 압력이 무한대로 상승하게 된다. 이 해석을 통해 그는 별을 한계까지 줄여 블랙홀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별이 죽어 중력에 의해 한계치까지 압축되고 있다면 그에 동등하게 저항할 힘(압력)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붕괴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발표가 있을 때 오펜하이머는 또 다른 제자인 하틀랜드 슈나이더와 블랙홀 연구에 착수해있었다. 오펜하이머는 무거운 별이 죽어갈 때 천천히 중력에 의해 압축되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폭발하듯 압축된다고 생각했다.(이것을 내파라고 부른다.) 실제 별에서 이러한 내파가 일어날 경우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에너지, 안쪽에 달라지는 밀도와 온도에 의한 압력 등 다양한 요소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펜하이머는 ‘간단하게 만들어서 계산해보자’라는 생각을 꺼낸다. 회전하지 않고 밀도도 일정하고 뿜어져 나오는 것도 없는 이상적인 별이 내파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슈나이더와 계산한 것이었다. 이 결과 특이하게도 붕괴한 별의 표면과 멀리 있는 외부 관측자의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계선으로 갈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곳. 블랙홀이었다.
1939년 9월 1일. 오펜하이머와 슈나이더의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여전히 학계는 블랙홀을 믿는 것을 망설였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천체가 실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으로 대표되는 이전 과학자 그룹의 의견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거기에 먼저 주목받은 것은 같은 날 발표된 또 다른 이론이었다. 양자역학의 거목인 닐스 보어와 미국의 젊은 학자 존 휠러가 함께 발표한 핵분열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곧 전 세계를 한 가지 연구로 밀어넣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원자폭탄 개발이었다. 블랙홀을 연구하던 오펜하이머의 팀은 통째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결국 9월 1일의 블랙홀 논문은 오펜하이머가 이 분야에서 발표한 마지막 논문이 되었다.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는 맨하탄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다시 물리학계에 복귀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이 쌓이게 되었고 그 중 원자폭탄은 블랙홀처럼 내파를 이용해야 했다. 오펜하이머는 블랙홀 이론의 본격적인 방아쇠를 당겼지만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돌아온 뒤로 다시 이 연구를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가 트리니티 원자폭탄 실험 이후 떠올렸다는 힌두교 경전 속 구절인 ‘나는 이제 죽음이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라는 내용은 인간을 멸망시킬 무기를 만들어 냈다는 씁쓸함이 담긴 표현일 것이다. 지상에서 세상의 파괴자를 만들어 낸 그가 하늘에서도 우주의 파괴자나 다름없는 블랙홀을 끌어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 자료
- 킵 S.손 (박일호 역). 2016. 블랙홀과 시간여행. 반니
- 카이버드, 마틴 셔윈 (최형섭 역). 2023.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 미치오 카쿠 (박병철 역). 2006. 평행 우주. 김영사
- 이강영. 2012. 보이지 않는 세계. 휴먼사이언스
- 프리먼 다이슨(김학영 역). 2015. 과학은 반역이다. 반니
- 홍아름. 2023. 가려진 오펜하이머의 삶. 화려한 경력 불구 스파이로 전락 “양자, 블랙홀 연구 기틀”.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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