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과학사: 가장 위대한 한걸음 (2)

 1967년, NASA는 아폴로 미션의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제미니 미션이 진행됨과 동시에 아폴로 미션의 우주선을 제작해야만 했다. 기존에 제미니 미션 제작에 참여한 곳(두 미션을 동시에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이 아니라 새로 선정된 업체의 경우 시작부터 문제가 터져 나왔다. 빠르게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아폴로 시험 비행선은 통신 시스템, 계기판 뿐 아니라 생명 유지 장치에서도 잦은 오류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다시 설계를 시작하기에는 예산도 걸림돌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돈먹는 하마처럼 미국의 예산을 끌어당기고 있던 시기, 뜬구름 잡는 것과 같던 달탐사에 더 큰 돈을 밀어넣기에는 행정부의 힘이 부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가 1967년 1월 27일에 제대로 터진 것이다.

아폴로 1호 우주인의 모습. 왼쪽부터 거스 그리섬,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 그리섬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중 한 명으로 훈련 전까지 우주선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계속 피력했었다.


 AS-204라는 이름이 붙은 테스트 미션은 발사 단계 전 최종 점검을 위한 것이었다. 아폴로 1호의 발사를 한 달 정도 앞둔 상황으로 최대한 실제와 가까운 연습이 필요했다. 오후 2시 50분에 시작된 훈련은 계속된 통신 장비 오류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테스트가 길게 이어지던 오후 6시 30분. 우주선 안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불이 붙은 것이다. 우주선의 해치를 다시 연 시간은 그로부터 약 90초가 지난 이후. 우주인 3명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불에 탄 아폴로 1호 우주선의 모습


 화재 원인은 어이없게도 우주선 바닥에 깔린 전선에서 튄 스파크였다. 작업자들이 드나들면서 전선의 피복이 벗겨졌고 그 부분에서 튄 스파크가 화재로 이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지구의 공기였다면 그 정도 스파크로 큰 화재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주선 안은 100% 산소로 채워져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지구 공기처럼 질소를 포함시키면 무게만 무거워진다고 생각했었다. 여기에 안쪽으로 열리도록 설계된 해치의 디자인 등 여러 요인이 얽혀 큰 문제로 이어진 것이었다.

 아폴로 1호(이후 사고를 당한 우주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정식 미션으로 인정되었다.) 사고는 완벽한 인재였다. 훈련이 진행되면서 여러 우주비행사가 비행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고 제작 과정의 문제를 NASA 모두가 지켜봤다. 안일함에 갇혀있던 NASA는 안팎에서 터지는 질타에 전면적인 재검토를 실시하게 되었다. 우주선 발사는 연기되었고 체계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산소 비율, 우주복 재질부터 우주선의 자잘한 설계까지 다시 한번 꼼꼼한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잠시 멈췄던 아폴로 미션이 1967년 11월 9일. 아폴로 4호의 발사로 새 출발을 알렸다.

새턴V 로켓의 모습


 아폴로 4호는 사실상 새턴V로켓의 테스트용 발사였다. 거대한 기둥에 가까운 로켓을 만들기는 했으나 시험 없이 발사를 할 수는 없었다. 성공적으로 발사된 4호 로켓은 아폴로 우주선을 궤도에 안착시켰다. 이 기세를 몰아 두 달 뒤에 발사한 아폴로 5호부터는 뭔가 불길한 기운이 이어지고 말았다. 탑재된 달착륙선이 오류로 인해 제대로 된 지구 재진입에 실패하고 추락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석달 뒤에 발사한 아폴로 6호도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로켓 이상으로 우주선에 손상이 생겼고 사령선 귀환 연습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아폴로 6호 로켓 분리 장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성과는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4호, 5호, 6호는 무인 우주선이었다는 점인데 7호부터는 실제 우주인이 탑승한 채로 발사될 예정이었다. 불안감이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NASA는 오히려 계획을 바꿔 엑셀을 세게 밟아버리는 선택을 한다. 기존 달 착륙선 테스트로 예정되어있는 아폴로 8호의 미션 목표를 완전히 바꿔 달로 보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과가 100퍼센트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소련의 달 탐사 계획보다 먼저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것은 NASA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미국의 정보망에 소련의 유인 달탐사 계획인 ‘존드 미션’이 걸렸고 이는 NASA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마침 아폴로 8호가 계획 중이던 달 착륙선 테스트는 기체가 완성되지 않아 골치 아프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구 궤도를 돌면서 착륙선 테스트를 하려했던 아폴로 8호는 예정에도 없던 달 궤도 진입으로 미션이 확 변경되게 된다.

아폴로 8호의 승무원들. 왼쪽부터 짐 러벨, 윌리엄 앤더스, 프랭크 보먼. 선장인 보먼은 아폴로 1호 사고 때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유일한 우주비행사였다.

 이 선택은 많은 우주인의 운명을 바꿔버렸는데 아폴로 9호에 배정되어있던 우주인들은 아폴로 8호로 자리를 이동하여 갑작스럽게 달 궤도에 맞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기존 아폴로 8호 탑승 예정 인원은 달착륙선이 완성된 후 발사될 아폴로 9호로 자리가 변경되었다.) 그들이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6주 뿐이었다. 심지어 같은 팀으로 훈련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가 목 디스크로 인해 수술을 받아 맴버 교체까지 진행되었다. 아폴로 8호는 아폴로 미션의 가장 큰 분수령에 섰다.

바다에 착륙한 존드 5호의 모습. 다만 존드 6호는 맨 땅에 추락하여 탑승한 동물들이 죽고 말았다.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 로켓이 발사대에 섰다. 인류 최초로 달을 향한 비행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아폴로 7호의 비행 성공으로 로켓에 대한 신뢰가 약간은 생겼지만 지구를 떠나 달로 간다는 것 자체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도전이었다. 사실 8호 발사 전인 9월과 11월. 소련에서는 존드 5호와 6호를 발사하여 달까지 동물들을 보내는데 성공했었다. 착륙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달 궤도를 생명체가 처음 다가간 것 역시 소련이 뺏어간 상태였다. 아폴로 8호의 성공은 단순히 달 궤도 비행이 아니라 미국이 소련에 앞서갈 수 있는 최초의 도전이었다.

 아폴로 8호의 출발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었다. 엔진은 우주선을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았고 우주인들은 우주에서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5분 남짓되는 방송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억 단위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냉전 중인 관계로 공식적인 집계는 불가능했지만 소련을 비롯한 반대편 진영에서도 이 장면을 모두 지켜봤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폴로 8호의 대성공은 미국이 최초로 소련을 넘어선 교차점이자 좀 더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신호가 되어주었다.

윌리엄 앤더스가 촬영한 지구돋이 사진. 최초로 인류가 달에서 직접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8호의 성공적인 귀환 이후 NASA의 계획은 가속도가 붙었다. 아폴로 9호는 지구 궤도에서 달 착륙선을 테스트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아폴로 10호는 다시 달 궤도를 돌면서 달 착륙을 제외한 모든 것을 테스트했다. 이제 11호의 차례가 왔다. 이미 8호의 계획이 변경되면서 사실상 가장 유력한 달 최초 착륙은 11호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그 사이 계획이 모두 성공해야 했지만) 당시 11호에 탑승 예정자는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 착륙선 조종사 프레드 헤이즈였다. 세 사람은 함께 아폴로 8호의 예비 우주인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중간 과정에서 목 디스크에서 돌아온 마이클 콜린스가 사령선 조종사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버즈 올드린이 착륙선 조종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빠진 프레드 헤이즈는 하필 달착륙에 실패한 아폴로 13호에 탑승하게 된다.) 팀은 구성되었다. 목표도 확실해졌다. 이제 인류의 최종 목적. 달 착륙만 남았다.

아폴로 11호 우주인.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 세 사람 모두 제미니 미션부터 우주 비행을 한 베테랑 우주인이었다.


 세 우주인의 성격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조용한 편에 속했던 암스트롱과 달리 올드린은 비교적 야심가에 가까웠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콜린스의 일이었다. 이는 누가 가장 먼저 달에 내려가느냐에 대한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아폴로 11호의 목표가 사실상 달착륙이 되자 언론은 당연하게도 누가 먼저 착륙하는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암스트롱이 그 논쟁에서 한 발 물러나 관망했던 것에 비해 올드린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였다. 실제로 제미니 계획에서는 선장이 아닌 조종사가 선외 활동을 했던 선례가 있어 암스트롱이 아닌 올드린이 첫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착륙선의 구조 상 암스트롱이 먼저 착륙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잠시 시끄러웠던 상황도 잠잠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암스트롱, 콜린스, 올드린의 회상이 다 제각각인데 올드린 입장에서는 빨리 착륙 순서 확정을 지어주지 않아 말이 나오는 것이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달착륙선의 내부 모습. 왼쪽이 선장(암스트롱)자리, 오른쪽이 조종사(올드린)의 자리이다. 아래쪽에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올드린 방향으로 열린다.


 1969년 5월. 아폴로 10호의 비행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두 달 뒤에 있을 11호의 목표가 달 착륙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서먹서먹해 보였던 세 우주인도 긴 훈련 기간을 거치면서 그 사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고된 훈련의 결실(암스트롱은 착륙용 비행기 훈련 중 사고로 비상탈출을 해야하는 아찔한 상황도 겪었었다.)을 맺기 위해 7월 16일 8시 32분. 거대한 새턴V 로켓이 불을 뿜었다. 우주선에 탑승한 세 우주인이 드디어 달을 향한 우주 공간으로 던져진 것이다.

아폴로 11호의 발사 장면


 출발 단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우주선은 정상적으로 지구 궤도에 올랐고 달 궤도에 오르기 위해 추가로 엔진 점화에 성공. 원하던 속도에 이르렀다. 콜린스는 새턴 로켓에서 사령선과 착륙선을 무사히 뽑아냈고 이제 달 궤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선체 점검 및 기계 확인, TV 생방송 진행 등 여러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세 우주인은 출발 4일째 되는 19일. 달을 코앞에 만나게 되었다. 우주선의 속도를 줄여 달 궤도에도 안착한 아폴로 11호에게 남은 미션은 착륙 뿐이었다.

발사 한 달 전 시뮬레이터에서 훈련 중인 암스트롱


 이때까지 진행한 모든 일은 이전 아폴로 8호나 10호가 성공한 내용이었다. 이제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자리를 착륙선으로 옮겼다. 콜린스가 외로운 비행을 해야 하는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달에 착륙해야 했다. 7월 20일, 우주복을 챙겨입은 두 사람은 착륙선에 들어간 후 1시간 40분을 통신 점검 등 분리 작업에 썼다. 모든 내용이 정상임을 확인한 후 드디어 사령선 ‘콜롬비아’와 착륙선 ‘이글’이 분리되었다. 콜린스가 사령선 창문으로 착륙선의 장치가 제대로 펼쳐졌는지 확인하고 난 뒤 여러 장비 점검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드디어 착륙선은 하강 궤도를 향해 움직였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착륙까지는 고작 30~45분 남짓 남은 상황이었다.

콜롬비아호에서 촬영한 이글호의 모습


 이글호에는 당연하게도 레이더 고도계가 탑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강 초기에는 우주선이 거꾸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암스트롱이 직접 계산해야했다. 우주선 창문에 달린 표시선과 스톱워치를 이용해 고도를 확인한 암스트롱은 예정된 위치를 지나는지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강 3분 만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하강 속도나 고도는 괜찮은데 위치가 조금 달랐던 것이다. (이 원인은 추후에 밝혀지는데 사령선과 분리할 때 통로에 남아있던 잔여 압력이 이글호를 예상보다 더 밀어버린 것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통로 압력까지 제대로 체크하게 되었다.) 착륙 자체가 성공해도 위치가 심하게 달라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 질 수 있었다.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프로그램 경고 신호까지 작동한 것이다. 1202 에러라고 표시된 경고 신호음에 생중계로 보고 있던 전세계 시청자들이 긴장했다. 당시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가 무선 송신에서 나오는 소리일 뿐이라고 안심시켰으나 그렇다고 에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상 관제 센터에서는 빠르게 신호를 무시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정말 다행히 해당 오류와 똑같은 상황이 발사 11일 전 모의 비행에서 나왔던 것이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아닌 12호 예비 우주인의 훈련 도중이었으나 이 당시 오류를 지켜 본 담당자에 의해 무시해도 되는 내용이라는 점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1202 에러에서 아폴로를 구해냈던 프로그래머 마가릿 해밀턴. 당시 컴퓨터 성능으로는 한번에 여러 일을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해밀턴은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강제로 주요 미션만 진행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경고 신호를 벗어났으나 아직도 위험이 남았다. 착륙 지점에 바위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잘못 착륙하면 착륙선이 넘어지거나 파손될 위험이 있었다. 살아서 달에 도착은 할지라도 지구로 귀환이 불가능할 수 있었다. 암스트롱은 착륙선을 수동 조작하기 시작했다.

고도 152.4m. 암스트롱이 수동 조작을 시작했다. 달 표면 빛 반사로 거리 감각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고도 60.96m. 드디어 착륙할만한 장소를 눈으로 확인했다.

고도 48.77m. 우주선의 연료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고도 30.48m. 달의 흙먼지가 일어나 아래쪽 시야가 가려지기 시작했다. 연료는 5% 뿐이었다.

고도 22.86m. 이제 60초 뒤면 착륙을 계속 진행할지 포기할지 데드라인에 도착한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이미 착륙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고도 18.29m. 착륙선은 여전히 제자리 하강이 아닌 전진 하강을 하고 있었다.

..

고도 6.1m. 드디어. 접촉등에 불이 들어왔다.

올드린이 접촉등에 불이 들어왔다고 말했으나 암스트롱은 엔진은 바로 끄지 않았다. 달의 먼지 때문에 제대로 착륙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엔진은 꺼졌다. 착륙선의 다리는 모두 바닥에 착지했다.

Houston, Tranquility Base here. The Eagle has landed.
(휴스턴, 이곳은 고요의 바다. 이글 착륙했다.)


 착륙이 끝나고 약 18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암스트롱은 관제센터에 착륙을 선언했다. 남아있는 연료는 고작 50초 분량이었다. 또한 착륙 지점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에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다시 돌아오는 궤도 계산을 위함인데 한참동안 찾아도 확인이 어려웠다. 실제로 사령선에 있던 콜린스는 아무리 찾아도 동료들의 착륙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당황했다고 한다.

 달에 착륙한 두 사람은 짧은 휴식 시간을 가지고 나서 (실질적으로는 나가기 위한 준비 시간에 가까웠다.) 이글호의 해치를 열었다. 표준시각으로 2시 56분, 미국 동부 시각으로 오후 10시 56분. 암스트롱은 거대한 우주복을 입은 채 달에 첫 발자국을 남겼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입니다.)


 암스트롱이 달의 땅을 밟고 말한 이 대사는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언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시작은 강대국들의 자존심 싸움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아폴로의 결과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이념으로 인해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던 세상을 잠시 동안 TV 앞에 한 마음으로 묶어놓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전쟁 중이던 남미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아폴로 11호의 역사적 달착륙을 보기 위해 휴전을 하기까지 했다. 달에서 보내는 그들의 영향력이 온 지구를 감싸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글호에서 작업중인 암스트롱. 암스트롱이 착륙한 그 순간은 아니고 올드린이 그의 모습을 촬영한 몇 안되는 사진이다.
올드린의 발자국. 암스트롱의 발자국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올드린의 것이다.


 시간은 흘러 아폴로 11호 이후 12호, (13호는 달 착륙에는 실패했다.) 14호, 15호, 16호, 17호가 달을 방문하고 떠난 지 50년이 넘어갔다. 그 긴 세월을 넘어 작년, 아르테미스 미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달을 다시 두드리고 있다. 새로운 우주인과 새로운 로켓으로 우리는 또 한 번 저 하늘의 달에 도달하고자 한다. 아폴로 미션이 우리에게 큰 감동과 경이로움을 줬던 것처럼 다음 미션 역시 성공적으로 인류의 위대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암스트롱이 찍은 위대한 첫 발자국에 이은 두 번째 발자국. 이제 그 발자국을 ‘우리’가 준비해야 인류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 제임스 R. 핸슨 (이선주 역). 2018. 퍼스트맨. Denstory
  2. 마이클 콜린스 (최상구, 김인경 역). 2008. 플라이 투 더 문. 뜨인돌
  3. 제프리 클루거 (제효영 역). 2018. 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 RHK
  4. 곽재식. 2022.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동아시아
  5. Richard Hollingham. 2017. The fire that may have saved the Apollo programme. BBC
  6. John Uri. 2022. 55 Years Ago: Tragedy on the Launch Pad.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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