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20일. 전 세계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같은 시각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남산에 위치한 야외음악당에 모여 커다란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도합 수십억 명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약 38만km 떨어져 있는 동그란 물체. ‘달’이었다. 매일같이 하늘에 떠오르는 달을 향한 그 수많은 시선의 끝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전. 유인 달착륙에 도전하는 세 우주인인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가 있었다.
시간을 돌려 1950년대. 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세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다. 총부리는 겨누고 있지만 막상 서로 당기지 못하고 있던 두 거대 맹주들은 다른 방식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적보다 더 뛰어난 무기, 더 뛰어난 기술력이 그 대상이었다. 미국보다 한발 뒤쳐 졌다는 평가를 듣던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MB) 개발에 큰 힘을 쏟게 된다. 그렇게 개발에 성공하게 된 R-7로켓은 핵폭탄을 날리기 위한 용도였다. 미국 역시 뒤늦게 ICMB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들이 기술적인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생각을 한순간에 박살낸 사건이 1957년 10월 4일 발생한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에 올라간 것이다. 딱히 기능이랄 것이 없는 스푸트니크였지만 미국에게는 소련의 핵무기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불릴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이 사건은 미국의 로켓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해군이 개발한 로켓 뱅가드는 발사대에서 폭발하는 사고를 전세계에 생중계하는 대굴욕을 당하고 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최초의 포유동물 비행도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조차 소련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미국의 자존심이 땅에 쳐박혔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의 최초 우주비행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상황을 한순간에 바꿀 카드를 한 장 준비한다. 단순히 우주를 잠시 들렸다 오는 수준을 넘어 ‘달’에 사람들 보내는 미션을 계획한 것이다. 1962년 9월 휴스턴에 위치한 라이스 대학에서 있었던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은 우주 관련 어록에서 빠지지 않는 명연설로 손꼽힌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또 다른 일도 할 겁니다. 그것이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아는 ‘어려운 일’인 달 탐사는 미국의 중요한 국책 사업이 되었다. 미국은 1962년 당시 우주인의 궤도비행까지 성공한 상태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한 10년 안에 달에 가기 위해서는 속도를 더 높여야만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진 만큼 우주에 올라갈 우주비행사 역시 추가로 충원해야 했다. 미국인의 큰 관심을 받으며 출발했던 최초의 우주인 그룹 ‘머큐리 세븐’에 이어 두 번째 우주비행사 그룹을 1962년 공표한다. 비록 최초가 아니었기에 대중의 관심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이때 뽑힌 9명의 우주인들은 앞으로 있을 달 탐사 계획의 핵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대부분 군인이었던 우주비행사 그룹에서 2기에는 한 명의 민간인 조종사가 포함되게 된다. NASA의 전신인 NACA(미국 국가항공자문위윈회) 때부터 테스트 파일럿으로 근무하던 ‘닐 암스트롱’이었다.
사실 암스트롱은 NASA가 우주비행사를 선발할 때 지원서를 마감 기한까지 제출하지 못했었다. 일주일이나 지나서 도착한 암스트롱의 지원서는 과거 그의 상사였던 사람들(시험비행연구센터에서 자리를 옮겨온 사람들)에 의해 문제없이 추가되었다. 시험비행연구소의 가장 어린 직원이었던 암스트롱은 어쩌면 2기 우주인 중 가장 우주에 친숙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활약했던 시험기종인 X-15는 마하 6의 속도를 돌파하며 우주에 가깝게 올라갈 수 있었다. 실제로 X-15는 NASA 우주비행사들이 우주복(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고 조종하기도 했으며 고도 80km를 넘기도 했다. 이 기종 개발에 참여했던 암스트롱은 이미 어느 누구보다 목숨을 건 비행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암스트롱이 활약하던 시기 우주비행사보다 시험비행사의 사망 확률이 훨씬 높았다. 1952년에는 약 10개월 동안 그가 소속된 연구소에서만 62명의 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훈련 역시 이미 암스트롱에게 익숙한 것들이 많았다. 물에 빠졌을 때를 대비한 생존 훈련 (이미 해군에서 경험한 훈련이었다. 암스트롱은 해군 조종사 출신으로 한국전쟁에서 참전하여 원산 일대에서 작전을 펼친 경력이 있다.) , 원심 가속기 훈련 (역시 시험 비행 조종사로서 자주 경험한 내용이다.), 모의 비행 훈련 (시험 비행 시 가장 많이 하는 내용이다.) 등 온갖 훈련을 거친 암스트롱과 NASA 우주인들에게 다음 미션이 주어진다. 달에 가기 전 수많은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한 ‘제미니 미션’이었다.
이전에 발사했던 우주선이 1인승이었다면 제미니 미션부터는 2인승으로 훨씬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 두 배가 되었으니 우주인도 당연히 더 필요했다. NASA는 2기 우주인에 이어 금방 3기 인원을 충원하였다. (총 14명의 우주인이 추가되었는데 이 중 2차 선발에서 낙방했던 공군 테스트 파일럿 마이클 콜린스와 공군 조종사이자 MIT 박사였던 버즈 올드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원이 늘어난 우주비행사들은 제미니 미션에 따라 차례차례 우주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미니 최초의 유인 비행이었던 3호부터 미국 최초의 우주 유영을 진행했던 제미니 4호, 우주 공간에서 랑데부 비행(두 우주선이 서로 같은 속도로 가깝게 비행하는 방식)을 진행한 제미니 6호와 7호. (7호는 2주라는 최장기간 우주 체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발사대에는 제미니 8호가 자리 잡았다.
제미니 8호의 미션은 우주에서 최초로 다른 우주선과 도킹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전 6호와 7호가 서로 가까이 비행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다음 스텝을 준비한 것이다. 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달에 착륙선을 보낸 것이 불가능했다. 이런 중요한 임무를 안고 8호에 탑승한 인원은 닐 암스트롱과 데이비드 스콧(추후 아폴로 9호의 사령선 조종사이자 15호의 선장)이었다. 제미니 8호는 성공적으로 표적 위성에 접근하였고 도킹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계 최초 우주선 도킹의 기쁨도 잠시, 제미니 8호에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도킹이 성공하고 얼마 후 우주선은 통신이 되지 않는 지역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 사이 도킹된 두 우주선은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두 우주인은 도킹을 해제했지만 우주선의 회전은 더욱 심해졌다. (추후에 제미니 8호의 궤도 조절 장치 중 하나에 합선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회전 속도가 1초에 한 바퀴가 될 정도로 빨라지자 암스트롱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두면 우주인의 시야가 좁아지고 심하면 기절까지 가능했다. 그는 우주선에 장착된 궤도 재진입 장치를 사용하여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우주선에는 잔여 연료가 부족하게 되었고 제미니 8호는 조기 귀환을 해야했다. 도킹 이후 선외 수리 시뮬레이션 등 추가 미션이 많았지만 모두 취소하고 비상 착륙까지 이어진 긴박한 사건이었다.
비록 주어진 미션을 모두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비상 상황에 대한 침착한 대처로 암스트롱은 자신의 능력을 검증한 사건이 되었다. 그의 제미니 8호가 다 하지 못한 도킹 후 우주 유영은 제미니 10호에 탑승한 우주인, 마이클 콜린스가 성공했으며 뒤이어 발사된 마지막 제미니 미션인 12호에서는 누적 최장 시간 우주 유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버즈 올드린이었다.
제미니 계획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미니 계획이 진행되던 시기 이미 다음 단계를 위한 로켓은 개발이 되고 있었다. 새턴 V라 불리는 110m짜리 초대형 로켓이 거의 완성되었다. 우주로 갈 로켓이 준비되었고 탑승할 우주인들이 여러 미션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이제 두 가지 갈래를 통해 진행중이던 달탐사 계획이 ‘아폴로 미션’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합쳐져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 1967년 1월 27일.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했던 아폴로 미션에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폴로 1호의 발사를 위한 훈련 도중 화재 사고가 발생하여 우주인 3명이 사망하고 만 것이다. 우주에 올라가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지상 훈련 도중에 벌어진 참사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약속한 60년대가 고작 3년 남은 시기. 아폴로 미션은 거대한 고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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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제임스 R.핸슨(이선주 역). 2018. 퍼스트맨. Denstory
- 마이클 콜린스(최상구, 김인경 역). 2008. 플라이 투 더 문. 뜨인돌
- 제프리 클루거(제효영 역). 2018. 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호. RHK
- 곽재식. 2022.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동아시아
- Bob Granath. 2017. Gemini’s Frist Docking Turns to Wild Ride in Orbit.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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