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과학사: 그 모든 것의 시작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부터 시작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 시기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 왔다. 단순히 신화에 머물러 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저 질문에 대한 답을 ‘빅뱅 우주론’이라는 이론을 통해 찾아가고 있다. 시트콤 이름에도 쓰일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해져버린 이 ‘빅뱅 우주론’의 시작은 세상에서 잊혀질 뻔했던 한 과학자 겸 신부의 손에서 이뤄졌다. 1927년 4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주의 출발점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모습과 중력장 방정식. 우측항 뒤에 붙은 람다가 우주상수이다.


 1920년대 과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목은 (당시에는) 살아있는 천재 아인슈타인이었다. 1905년 기적의 해를 지나 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그는 1917년, 일반상대성이론의 우주론적 고찰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인해 생긴 이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가 2년 전 완성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면 매우 이상한 형태의 답이 도출되었다. 우주가 중력으로 인해 한 점으로 뭉쳐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우주상수라는 특별한 문자를 수식에 포함시켰다.

빌렘 드 시터와 알렉산드르 프리드만. 프리드만은 자신의 이론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1925년, 36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는 우주가 중력으로 인해 줄어들지 않고 멈춰있을 수 있는 반대의 힘을 의미했다. 이처럼 그가 무리해서라도 우주를 멈추고 싶어 했던 것은 우주가 움직인다는 생각 자체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뉴턴조차도 정적인 우주를 위해 중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한한 우주’를 주장했으니 아인슈타인 역시 이 부분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우주 모형은 곧바로 또 다른 이론에 의해 공격받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빌렘 드 시터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용하여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의 공간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22년, 소련의 수학자인 알렉산더 프리드만 역시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어내 우주가 팽창한다는 모형을 최초로 발표하였다. 이 모든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은 완고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결과는 단지 수학적으로 맞을 뿐이다. ‘실제 우주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제 5차 솔베이 회의 단체사진. 이 사진 속 인물 중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만 17명이다. (노벨상의 개수는 18개. 마리 퀴리가 2개를 받았다.)


 시간이 흘러 1927년 10월. 벨기에에서 제 5차 솔베이 회의가 열리게 된다. 사실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다른 학자들의 주 관심사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가설이 아니었다. 닐스 보어로 대표되는 신흥 학문 양자물리학이 아인슈타인에게 큰 한 방을 먹이는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이 5차 솔베이 회의였다. 본인의 이론이었던 광전효과에서 파생된 양자역학에 일격을 당하던 아인슈타인에게 젊은 한 사제가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조르주 르메트르. 벨기에 출신의 이 사제는 다시 한 번 아인슈타인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팽창 우주라는 가설을 들고 온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르메트르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였던 르메트르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진로를 과학자 겸 사제로 결정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아주 흥미로운 최신 이론이었다. 1922년에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라는 논문을 써 해외 유학 장학생으로 선정된 르메트르는 영국에서 상대성이론의 대가 중 한 명인 아서 에딩턴을 만나게 된다. 이 시기는 르메트르 뿐 아니라 천문학계에서도 새로운 발견이 소용돌이 치던 때였다.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그는 1925년, 에드윈 허블이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거리를 측정하면서 천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관측 자료와 이론이 끊임없이 나오던 시기에 르메트르는 더 혁신적인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 결과가 1927년 논문으로 발표된 팽창하는 우주였다.

1933년 르메트르와 아인슈타인. 맨 좌측의 인물은 로버트 밀리컨으로 역시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


 르메트르의 논문은 발표 당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애초에 논문을 발표한 브뤼셀 과학협회 연보는 그리 영향력 있는 곳이 아니었다. 프랑스어로 적힌 글은 사람들의 접근성을 올려주지 못했고 지도교수였던 에딩턴 역시 받은 사본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서 팽창 이야기를 꺼냈던 프리드만에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던 아인슈타인에게조차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그의 주장이었으나 르메트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주가 팽창한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렸을 때 한 점으로 작아진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이 작아진 우주를 르메트르는 ‘원시 원자’라고 불렀다.

특이하게도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하여 탄생했을 거라는 생각은 1848년 애드거 앨런 포의 글 ‘유레카’에서 처음 등장했다. 물론 당시 그의 생각은 ‘글’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르메트르의 이론이 시간 속에 파묻혀 가던 1929년. 에드윈 허블이 천문학계를 발칵 뒤집어버릴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외부은하들에서 거리와 시선속도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논문은 우주에 있는 은하가 멀리 있을수록 더 빠르게 멀어진다는 사실을 담고 있었다. 그의 관측 자료가 뒷받침되어 있었으니 이제 그 결과가 당시에 나와 있던 이론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봐야 했다. 관측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에도 맞지 않았고 드 시터의 이론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학계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새로운 이론은 그것을 애타게 찾고 있던 에딩턴의 서랍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에드윈 허블의 모습. 연이은 발견으로 우주 팽창의 근거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이지만 정작 허블은 해당 논문에서 특별히 우주 팽창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에딩턴이 뒤늦게 찾아낸 르메트르의 이론은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르메트르의 1927년 논문은 영어로 번역되어 1931년 영국 왕립천문학회에 소개된다. 특이하게도 이 번역된 논문에는 르메트르가 기존에 계산해냈던 허블 상수에 관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여러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허블이(또는 미국 과학계가) 자신의 업적을 높이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는 이 음모론은 그 번역을 한 사람이 르메트르 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그라들었다. (물론 허블이 이후 자신의 논문에서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상하긴 하다.) 르메트르는 이전 논문에 사용한 데이터보다 새로운 데이터가 많이 생겼으니 새로 계산할 생각을 하고 이전 계산 부분을 제거한 것이었다.

빅뱅이론 이미지


 관측 증거는 오랜 시간 정적인 우주를 믿었던 아인슈타인도 무너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론에는 구멍이 많았다. 팽창 속도를 거꾸로 돌렸을 때 우주의 나이와 발견된 천체의 나이가 역전된 이상한 상황도 있었으며 (이것은 허블 상수의 측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었다.) 우주가 한 점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학자들도 많았다. 이때 르메트르의 직업은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데 한 점에서 폭발했다는 내용 자체가 종교적 신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우주가 팽창할 때 속도가 가속될 수 있다고 했으며 (우주 가속 팽창), 그 증거가 우주선의 형태로 존재(우주배경복사)할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그가 생각한 한 점에 시간과 공간까지 집어넣으며 원시 원자 ‘이전’이라는 것을 지워버렸다. 이 모든 내용은 현대 빅뱅우주론에 등장하는 내용 그 자체였다.

1951년 르메트르와 교황 비오 12세의 모습. 르메트르는 말년에 몬시뇰(가톨릭 사제가 받는 명예호칭)의 칭호를 받기도 한다.


 르메트르의 활발한 활동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사그라들었다. 기존 우주론을 열었고 관심을 가지던 에딩턴, 드 시터 등의 학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르메트르 본인 역시 우주론에서 멀어져 컴퓨터 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현대 우주론의 시작을 알린 거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의 이론은 빅뱅우주론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르메트르의 이론과 정반대에 서서 빅뱅우주론을 비판했던 저명한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과학적 발견 업적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이미 그 발견의 언저리에 도달해 있을 때에야 과학적 발견을 이룩한 학자에 대한 인정과 대대적인 칭송이 가능하다. 반대로 너무 일찍 과학적 발견을 한 사람은 과학의 역사에서 언급이 거의 없어지게 된다.

 항상 우리는 ‘1등만 기억한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 1등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과학은 올림픽같이 순위를 정하는 경쟁이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발판이 되고 거기서 나온 생각이 또 다른 누군가의 도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 꽃을 피운 것이 과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너무 빠른 첫 업적을 남기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르메트르들에게 미리 축하의 인사를 건내본다. 당신의 노력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2018년이 되어서야 국제천문연맹(IAU)에서 투표를 통해 ‘허블의 법칙’이라고 불렸던 해당 내용을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9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르메트르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참고자료

  1. (진선미 역). 2009. 빅뱅-어제가 없는 오늘. 양문
  2. 김재영. 2015. 우주론을 바꾼 역사 뒤편의 영웅들. 과학동아
  3. 조송현. 2018. 상대성이론이 펼치는 우주론 (2)아인슈타인의 최대 실수. 인저리타임
  4. 이종필. 2022. [사이언스N사피엔스](마지막회)밤하늘은 왜 어두울까. 동아사이언스
  5. Jonathan Lunine. 2019. Faith and the Expanding Universe of Georges Lemaître. Church life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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