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손꼽히는 것은 보통 ‘대화’다. 대부분의 다툼은 ‘대화’와 ‘소통’의 부재였고 그에 따라 해결 방법 역시 부족한 것을 채워주면 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누군가와 말을 하면서 서로를 설득하고 이해해나가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의 갈등 해소 방식이다. 그런데 ‘대화’라는 이름을 달고서 오히려 세상을 어마어마한 소용돌이로 던져버린 것이 하나 존재한다. 1632년 2월 22일,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드 2세에게 헌정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인 ‘대화’가 그 주인공이다.
과학사에서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시작부터 물리학, 천문학을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피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인 갈릴레오는 학교를 중퇴한 뒤 수학자의 길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1592년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된 그는 이때부터 18년간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게 된다. 다만 ‘수학 교수’라는 직함이 그리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급여부터 철학 교수, 의학 교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이것 때문에 갈릴레이는 교수직말고 다른 부업으로 귀족 자제들의 개인 과외를 하곤 했다.) 결정적으로 ‘수학’의 발언권이 상당히 약한 시기였다.
당시 학계에서 수학의 위상은 철학에 비해 철저히 뒤쳐져 있었다. 천체의 운행 및 원인에 관해 제대로 논할 자격은 수학자가 아니라 ‘자연 철학자’에게 부여된 권리였다. 수학에게 주어진 것은 ‘계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에게 지동설의 주장자로 잘 알려진 코페르니쿠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물론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 이전, 그리스 시대에도 등장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탄압받았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당시 학자들에게는 ‘수학적 계산’에 있어 새로운 도구 또는 가설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상의 기본 원리에 영향을 준다기보다 수학적인 의미에 한정하여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연 철학자라는 새로운 관문을 넘을 필요가 있던 갈릴레이를 구원해 준 것은 그 유명한 망원경이었다. 파도바 대학에서 보냈던 마지막 해인 1609년, 망원경을 제작한 그는 바로 관측에 들어갔다. 당시 시중에 있던 망원경보다 성능이 좋은 것을 개발한 그는 달, 목성, 토성, 태양 등 대표적인 천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된 목성의 위성 4개를 ‘메디치의 별’이라 칭하며 토스카나 지역을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게 된다. 이처럼 1610년 발표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라는 이름의 책에는 그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여러 가지 사실 뿐 아니라 메디치 가문을 향한 헌사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하가 탄생하였을 때 지평선의 어두운 안개를 뚫고 중천으로 솟아올라 왕실의 동편을 비춘 별이 바로 목성이었습니다. 또한 이 목성은 장엄한 옥좌로부터 전하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광채와 위엄을 쏟아부어 대기를 더없이 정갈하게 했습니다… (후략)’
이 어마어마한 찬사를 메디치 가문에 쏟아부은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한 후원자의 눈에 들어 ‘자연 철학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같은 해 가을,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수학자 겸 자연 철학자가 되었다. 드디어 자연 현상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할 권한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상황이 모두 갈릴레이에게 좋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내용은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천동설 이론에 흠집을 낼만한 것이 많았다. 흑점의 이동, 목성 위성의 이동, 달의 표면 모습,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의 천동설 이론으로 해석이 어려운 것들이 발표되자 반대 급부로 그에 대한 비판 역시 나오기 시작했다. ‘망원경이 보여주는 모습은 환상이다.’라고 말하는 황당한 주장부터 성서 속에 나오는 것과 반하는 내용이라는 신학자의 반발까지 나왔으나 아직은 메디치 가문의 비호 하에 있는 갈릴레이를 위험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1615년,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니콜로 로리니의 고발로 인해 갈릴레이는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동설을 옹호하고 성서의 권위를 위협했다는 명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고 옹호하지 말라는 경고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신변적인 위협은 특별히 없었으나 갈릴레이의 과학 활동을 움츠러들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왔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제 235대 교황인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된 사건이었다. 그와 동시에 갈릴레이에게 우호적이었던 사제들이 교황청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갈릴레이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의 목표는 조석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물의 도시라 불리는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그는 조석 현상을 지구 공전, 자전의 증거라 여겼다. 1630년, 책의 검열만 남긴 상황에서 흑사병이 다시 도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본문의 검열을 하게 된 것은 피렌체의 검열관이었다. 같은 토스카나 대공의 영향권에 있던 관계인지 갈릴레이에게 우호적으로 진행된 검열은 1632년 2월, ‘대화’의 출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화’는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연극 형식의 책이다. 갈릴레이의 분신이자 코페르니쿠스의 옹호자인 살비아티,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을 옹호하는 심플리치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세그레도 세 사람이 진행하는 대화 형식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갈릴레이가 원했던 조석 현상 해석을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지동설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야 했다. 나흘 간의 토론으로 진행되는 책은 첫째 날 대화에서 천체관 자체를 언급하고 둘째 날에 지구의 자전, 셋째 날에는 공전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분량은 가장 적지만 마지막 넷째 날에 드디어 조석 현상이 등장한다.
이 책의 내용을 잘 따라가 보면 전혀 공정하지 않은 경기를 보는 기분을 준다. 중재자 역할인 사그레도의 포지션은 사실상 코페르니쿠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측에 있는 등장인물 심플리치오는 상당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연하게도 두 이론 중 지동설에 훨씬 무게를 준 모습이었다. 거기에 심플리치오 캐릭터가 교황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루머라고 해도 교황청에서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는 힘든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발표와 함께 갈릴레이를 긴 종교재판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 ‘대화’는 책 자체만 놓고 보면 잘못된 이론을 결론으로 놓고 출발한 책이었다. 달에 의해 조석 현상이 생긴다고 말한 요하네스 케플러를 ‘어째서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유치한 요술같은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갈릴레이는 이 이론에 진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수학적인 계산으로는 의미가 있다.’에 그친 것은 단순히 종교적 문제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지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부터 오랜 기간 보강되어 온 (다르게 보면 너무 많은 것을 첨가해 복잡해진) 천동설에 비해 계산적으로도 크게 우위에 있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직접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반격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천동설이라는 거대한 댐에 상당히 많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반면에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요하네스 케플러가 주장한 타원궤도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계산상의 오차는 여전히 발생한 점이나 지동설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연주시차가 여전히 발견될 기미가 없었다는 점(최초의 연주시차 발견은 183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베셀에 의해 이루어졌다.) 같은 문제, 교회와의 마찰로 더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면은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대화’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합쳐진 결과물이 되었다. 역사가 알고 있듯 이때 완성되지 못한 부분은 갈릴레이 사후 아이작 뉴턴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대화’는 분명 의미 있는 설득의 도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 자료
-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무현 역). 대화. 사이언스북스
- 다나카 이치로(서수지 역).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과 나무사이
- 이상욱. (2019).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 1632년 피렌체, 갈릴레오의 절반만 성공한 대화. HORIZON
- 이종필. (2019). [사이언스N사피엔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동아사이언스
- 김환영. (2017).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 – 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 포보스
- 나정민. (2008). 갈릴레이는 끝까지 ‘지동설’ 주장한 혁명가였나. 조선일보
- 허정원. (2018). 종교재판 두려웠나…갈릴레오 자필편지엔 줄 긋고 고친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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