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과학사: 과학의 탄생

프린키피아 표지의 모습

 1687년 7월 5일. 라틴어로 된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언어도 영어가 아니어서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을 가진 사람만 읽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자기 자랑용 책처럼 취급받을 것만 같은 이 책은 인류 문명과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거대한 선물이 되었다. 책 제목을 줄여 ‘프린키피아’라고 잘 알려진 이 책의 저자는 아이작 뉴턴이었다.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 1689년의 모습으로 프린키피아가 출간된 이후이다.


 우리는 흔히 뉴턴의 업적을 떠올리면 만유인력의 법칙 또는 뉴턴 운동 3법칙을 떠올린다. 당연하게도 이 내용은 프린키피아 안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이 개념을 뉴턴이 순전히 혼자 처음부터 떠올린 것은 전혀 아니다. 갈릴레이, 케플러, 데카르트, 심지어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유클리드의 흔적까지 이 책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책과 뉴턴을 그토록 높은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일까.

프린키피아 속 한 페이지. 이 책은 이처럼 원뿔곡선에 관한 수많은 증명을 담고 있다.


 프린키피아는 철저하게 ‘공리체계’를 이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공리란 증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을 의미한다. 뉴턴이 내세운 공리는 운동 3법칙이었다. 우리가 각각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이름 붙인 이 내용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의 연구를 뉴턴이 완성시킨 것이다. 애초에 1법칙인 관성의 법칙은 갈릴레이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물체가 가진 관성이라는 것을 갈릴레이가 처음 제대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인데 이후 그 내용을 더 확실히 정리한 것은 데카르트였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을 받아들이면서 힘이 작용할 때 물체의 운동으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가 2법칙, 3법칙인 것이다.

뉴턴의 서술체계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유클리드의 기하원론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던 방식이다.


 이렇게 3법칙이라는 튼튼한 기반을 공리로 쌓은 뉴턴은 그 위에 여러 정리를 추가해가며 이론을 완성해간다. 그렇게 쌓아가던 이론은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라는 역제곱의 법칙으로 나아간다. 그와 함께 케플러가 확인한 운동 3법칙까지 증명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케플러의 법칙은 관측을 통해 확인된 경험 법칙으로 정확한 증명을 뉴턴이 한 것이다. 이렇듯 기존 과학자들이 이곳저곳 펼쳐놨던 개념이 한곳에 모여 마치 액기스를 뽑아낸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체계에 사형 선고가 내려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 뉴턴 이전 가장 위대한 학자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운동과 천상의 운동은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두 운동 간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모든 운동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과가 흙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중심 해석을 잘 보여준다. 그에 반해 뉴턴의 해석에 ‘물체의 목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 모든 물체 안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규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현상이 운동이었다. 이렇듯 뉴턴의 생각은 수백 년간 여러 과학자가 시도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대한 벽을 깨는 강력한 한방이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의 모습. 베이컨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실한 것만 받아들이는 귀납적 방식을 제창했고 데카르트는 생각으로 출발하여 수학으로 증명하는 연역적 방식을 주장했다.


 프린키피아는 첫 출판 이후 바로 각광받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하게 커지고 있었다. 뉴턴이 책에서 사용한 이론의 접근 방식은 기존에 있던 방식을 완전히 합쳐 보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다른 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감을 주게 된다. 오죽하면 과학계를 넘어 사회 분야에서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연구되었을까. (이러한 뉴턴의 저작에 감명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뿌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였다.) 실험과 관측을 통해 얻어낸 ‘공리’를 사용해 새로운 이론을 뽑아내는 형태. 이 속에 가설이 존재할 공간은 없었다. 실제로 당시 가장 많이 받던 비판 중 하나인 ‘접촉하지 않고서 어떤 방식으로 중력이 작용하는가?’라는 질문에 뉴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세운 방식대로 가설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는 뉴턴의 동상. 뉴턴은 케임브리지 2대 루카스 석좌 교수였다. 루카스 교수를 거친 유명인으로는 컴퓨터의 아버지 찰스 배버지, 양자역학의 중심인물인 폴 디렉, 호킹 복사의 스티븐 호킹 등이 있다.


 보통 과학 혁명의 시작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간된 1543년으로 보고 그 마무리를 프린키피아가 출간된 1687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당겨진 불씨가 거대한 횃불이 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 결과는 아주 화려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에 묶여있던 과학이 객관적, 이성적, 합리적인 시선을 통해 해방된 것이다. 애초에 과학자라는 단어 scientist가 등장한 것도 뉴턴 이후인 1800년대 초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 탄생의 공을 뉴턴에게 돌려도 큰 모자람은 없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뉴턴의 비문에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적혀있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춰져 있었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쓴 이 구절은 뉴턴에 대한 엄청난 찬사로 가득하다. 현시점. 우리가 알기에는 아인슈타인이 그의 이론에 커다란 흠집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뉴턴은 단순한 이론의 발견자가 아니었다. 인류의 사고 방식, 생활 방식에까지 영향을 준 그의 업적을 생각하면 비문 속에서 밝아진 빛이 꺼지려면 아직도 한참은 남은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한.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뉴턴의 무덤

참고문헌

1. 안상현. (2015). 뉴턴의 프린키피아. 동아시아
2. 조송현. (2020). 우주관 오디세이. 인타임
3. 이종필. (2020). [사이언스N사피엔스] 과학혁명과 뉴턴주의. 동아사이언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34466
4. 이종필. (2019). [사이언스N사피엔스]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동아사이언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33171
5. 허연. (2012). [허연의 명저산책] 아이작 뉴턴 ‘프린키피아’.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2/01/31177/
6. 권홍우. (2017). 가장 난해하고 중요한 책, ‘프린키피아’. 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1OICUIZDD2


Copyright 2021. 의왕천문소식 김용환 연구원 All right reserved.
dydgks0148@astrocam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