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과학사: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1977년 9월 5일. 보이저 1호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2021년 9월 현재까지도 보이저는 탐사선 이름처럼 ( 보이저라는 단어는 여행자, 항해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우주 공간 속에서 홀로 외로운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무려 43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여행은 인류가 만든 물체 중 가장 멀리 떠나간 기록을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갱신하고 있다. ( 보이저 1호는 태양으로부터 153 AU(천문단위) 를 돌파했으며 보이저 2호는 127 AU를 넘어갔다. )


이처럼 역사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탐사선 보이저호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여정을 출발하게 된 것일까.


보이저 1호 발사 장면.
보이저 1호가 타이탄-센타우리 로켓에 실려 발사되고 있다. (이미지 : NASA)


NASA와 전 인류가 한참 달 탐사에 열을 올리면서 아폴로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1960년대. 이미 다른 행성으로의 탐사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진행된 매리너 계획으로 수성, 금성, 화성 탐사에 성공했고 스윙-바이라는 새로운 비행법을 수행해냈다. 그리고 그 시기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는 1970년대 행성 탐사에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외행성 정렬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낸다. 무려 175년 만에 일어나는 이 현상을 놓치면 화성 바깥에 있는 외행성 탐사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예산과 어마어마한 꿈을 품은 외행성 탐사 계획.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거의 200년 만의 기회.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은 시작부터 커다란 반대와 싸워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돈이었다. 이미 아폴로 계획으로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어 버리고 있던 시기였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베트남 전쟁 역시 돈 먹는 하마라고 볼 수 있었다. 우주 개발에 적극적이었던 케네디를 이은 닉슨 대통령은 이 엄청난 예산에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1965년, 52억 달러였던 NASA의 예산은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1971년에 33억 달러로 줄어들었고 과학자들은 어떤 탐사 계획을 살려야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NASA의 과학자들은 어떤 계획을 살릴지 치열한 토론과 로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화성 착륙선인 바이킹 프로젝트, 핵추진 로켓(NERVA) 개발, 우주 망원경 개발, 아폴로 계획을 계승할 우주왕복선 프로젝트까지. 하나같이 돈을 끝도 없이 부어대야 하는 계획이었다. 이 힘싸움에서 밀린 것은 다름 아닌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총 4회 발사로 계획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결국 무산되었고 매리너 계획의 외행성 탐사 파트로 대체되고 말았다.



바이킹 프로젝트와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의 패치
두 계획은 모두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최초의 화성 착륙 성공, 우주왕복선 발사 성공의 성과를 거둔다.
보이저까지 결국은 성공했으니 결과는 모두 만족스러워졌다. (이미지 : 위키피디아)




매리너의 외행성 탐사 계획은 비록 예산도 규모도 확 쪼그라들었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행성들을 한 번에 쓸면서 지나가는 궤도는 유지되었고 목성과 토성을 먼저 방문한 파이어니어 호의 탐사 결과는 새로 발사될 탐사선에 어떤 장비를 보강하고 어떤 미션을 줘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그렇게 매리너 11호와 매리너 12호로 불리던 두 탐사선은 기존 ‘매리너’라는 이름을 유지하기에 너무 많은 발전을 거쳤다.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977년 3월. 공모전 끝에 우리가 알고 있는 보이저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보이저 1호는 목성, 토성에 도착하여 탐사를 진행하고 추가적으로 타이탄을 탐사한 뒤 태양계 밖을 향해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 사실 타이탄을 들리지 않았다면 명왕성 탐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명왕성보다 타이탄에 더 호기심을 느꼈다. 이때부터 명왕성의 찬밥 신세는 예견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 보이저 2호는 조금 궤도가 다르기는 했지만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모두 거치는 미션이었다. 만일 1호에 문제가 생겨 미션에 실패하게 되면 뒤늦게 도착한 2호가 궤도를 바꿔 1호의 미션을 수행할 계획도 있었다. 천왕성, 해왕성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초에 초창기 매리너 계획의 목적이 목성, 토성이었던 만큼 우선순위는 정해져 있었다.


보이저 1호, 2호의 궤도.
평면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두 탐사선은 행성 궤도면의 위아래로 날아가는 중이다. (이미지 : 위키피디아)



1977년. 8월에 보이저 2호가 먼저 발사되었고 9월에 1호가 발사된다. 지금으로는 상상도 못 할 8비트 컴퓨터가 탑재된 보이저는 다행스럽게도 성공적으로 궤도에 안착했다. 물론 자잘한 고장은 무척 많았다. 보이저 2호의 카메라가 토성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아 완전히 검은 사진을 전송한 적도 있었고 보이저 1호의 플라즈마 검출기는 지속적으로 오류를 일으켰다. 아예 보이저 2호의 라디오 수신기가 작동되지 않아 예비용으로 간신히 비행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차가워지고 험악해지는 우주 환경에서 버티고 버틴 두 탐사선은 인류 역사에 남을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이오의 화산활동 발견, 외행성계에 있는 새로운 행성 무더기 발견, 행성 오로라 현상 발견, 목성의 고리 발견, 천왕성/해왕성의 역사상 최초 접근. ( 천왕성, 해왕성은 현재까지도 보이저 2호 외에 탐사한 경우가 없다. ) 보이저가 보내온 것 하나하나가 인류 최초 타이틀을 달고 있었고 그에 파생된 새로운 미션과 연구 과제들이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러한 과학적 성과에 추가로 보이저호는 인문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긴다.

보이저 1호가 찍은 목성 (왼쪽) 과 목성의 위성 이오의 화산 활동(오른쪽)
보이저 2호가 찍은 해왕성과 (왼쪽)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 (오른쪽)

보이저 1,2호가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역대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현재 천왕성, 해왕성과 관련된 사진들은 모두 보이저 2호가 찍은 사진들이다. (이미지 : NASA)




1990년 발렌타인데이, 60억km 거리까지 날아간 보이저 1호는 고개를 뒤로 돌려 태양계 행성의 사진들을 차례로 남기기 시작한다. 깊은 어둠 속에 자리 잡은 행성 중에 아주 작은 푸른 점으로 찍힌 것이 바로 지구였다. 이 작은 점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리면서 넓은 우주 속 지구, 인류의 위치를 표현해준다. 지식뿐 아니라 인류의 감성에까지 영향을 준 작품, 창백한 푸른 점은 보이저 탐사선들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 이 사진을 찍은 이후 보이저 탐사선들의 카메라 장비는 모두 OFF 되었다. )


창백한 푸른 점 사진
저 화면 속 작은 점이 지구이다. 이 사진 촬영을 제안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이 모습을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미지 : NASA )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저 탐사선들은 거의 대부분의 장비를 OFF한 채로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 여행 중이다. 현재 상태로는 2025년 이내에 마지막 통신이 올 것이며 그 이후에는 그야말로 우주 떠돌이가 될 예정이다. 마침 보이저가 그 끝을 보이고 있을 때 올해 NASA에서 새로운 성간 탐사 계획을 발표했다. 인터스텔라 프로브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계획은 2030년대에 태양권 계면을 넘어 1000 AU까지 비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보이저가 개척한 길을 넘어 더 멀리 더 새로운 곳을 찾으려는 인류의 집념은 이처럼 아직도 불타고 있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향하고 있는 보이저의 뒤가 더는 외롭지 않기를 바래본다.



보이저 1호와 2호의 모습.
왼쪽 사진이 보이저 1호, 오른쪽 사진이 보이저 2호의 모습이다. (이미지 :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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